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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다

: 정의당 대선 공약, 이렇게 본다
  • 입력 2022.06.14 14:24      조회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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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다-정의당 대선 공약, 이렇게 본다-장석준.pdf

 

장석준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진보정당 정책, 교육 활동에 종사해왔다. 저서로는 <신자유주의의 탄생>,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사회주의> 등이 있고, 역서로는 <길드 사회주의>, 콜의 산업민주주의>, <코로나 크래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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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정의당은 핵심 슬로건인 “주4일제 복지국가”를 제목으로 단 정책공약집을 냈다. 진보정당들이 총선, 대선에서 늘 그랬듯이 정의당도 2020년대 상황에 맞는 한국 사회 변화 비전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준비했으며, 그 결과가 두꺼운 대선 공약집에 상세히 정리돼 있다. 특히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경기도지사 시절에 강조한 기본소득 정책이 주요 이슈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응하는 정의당의 비전과 정책을 새롭게 준비한 내용이 많았다. 4대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인 “시민평생소득”으로 묶인 정책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전국선거가 닥칠 때마다 정당이 내놓는 두꺼운 정책공약집이 으레 그렇듯이 이번 공약집 <주4일제 복지국가>도 실제 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정당 당원이라 하더라도 공보물에 실린 몇 줄짜리 요약문을 볼까 말까 하고, 정책공약집을 직접 구해 읽는 이는 찾기 힘들다. 정책공약집을 인터넷으로 내려받아 꼼꼼히 읽어보는 이는 각 광역시·도당의 정책 담당자나 후보 TV 토론회에서 정의당 후보를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타당 간부 정도일 것이다. 한국 선거 풍토에서는 좀처럼 바뀌기 힘든 현실일뿐더러, 이번 대선에서는 애초 기대와 달리 정책 논쟁이 실종되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의당이 대선에 내놓은 정책공약집의 기본 얼개와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그다음에야 정의당 대선 정책에 관한 약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의 얼개와 주요 내용  

  정책공약집 첫머리에는 정의당이 스스로 4대 주요 공약으로 꼽은 핵심 정책들이 정리돼 있다. 4대 주요 공약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후위기, 그린노믹스”다.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그 과정에서 일자리도 늘리며 불평등도 치유하자는 구상이다. 그간 ‘그린 뉴딜’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던 방안이 ‘그린노믹스’로 정리된 것이다. 4대 주요 공약 중에서도 첫 번째이니 정의당이 기후위기 대책을 그만큼 중요시했다는 이야기다. 기후위기 현실과 한국 정치 상황의 간극이 너무나 큰 탓에 정의당의 기대 대로 대중에게 핵심 공약으로 각인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내용을 보면, 재생에너지, 전기차 등 녹색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바꾸자는 ‘녹색산업혁명’을 천명하고 이를 통해 수십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가령 에너지 전환 투자로 30만 개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민간 주택 등의 그린 리모델링 지원으로 10만 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형 뉴딜과는 달리, 정의당 대선 공약에서 이런 사업의 주체는 공공이다. 산업은행을 녹색투자은행으로 전환해 공적 자금으로 재생에너지 설비 투자 등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진두지휘하는 국가의 역할을 ‘혁신가형 정부’라는 이름으로 강조한다. 

  둘째, “주4일제, 신노동법”이다. 순서는 둘째이지만, 대선에서 정의당 정책 가운데 그나마 입말을 탄 것은 바로 이 공약이다. 정책공약집 제목이 된 핵심 슬로건이 다름 아닌 “주4일제 복지국가”가 아닌가. 그중에서도 특히 부각된 것은 주4일제였다. 심상정 후보는 당내 후보 경선 때부터 주4일제와 함께 신노동법 또한 강조했지만, 본선에서는 주4일제에 비해 신노동법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럴수록 정의당 스스로도 다른 내용보다 주4일제를 더욱 강조했다. 
  한데 정책공약집에 이 범주로 묶인 정책들을 보면, 그 내용이 “주4일제, 신노동법”이라는 표제보다 훨씬 더 광범하고 다양하다. 물론 주4일(주32시간) 근무제로 전환하자는 공약, 일하는 시민이면 누구나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비임금 노동자 700만 명과 5인 미만 사업장에까지 적용되는 ‘일하는 시민의 기본법(=신노동법)’을 제정하는 공약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 중대한 의미를 담은 다른 공약들도 있다. 장시간 노동을 줄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에 대해서는 오히려 최소 노동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공약도 있고, 국가가 완전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구직자에게 직접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국가일자리보장제’도 있으며, 단체협약을 하청기업이나 소규모 사업장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단체협약확장제’도 있다. 

  셋째, “주거, 부동산”이다. 사실 ‘주거’와 ‘부동산’은 동어반복일 수 있다. 그런데 두 말이 병렬돼 있다. 그만큼 지금 한국의 주거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정당 입장에서는 그저 “주거”라고만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게 맞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국의 집 문제는 마치 ‘주거’ 측면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부동산’ 측면만 존재하는 듯 다뤄진다. 집을 자산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관점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래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은 주거 정책이 아닌 부동산 정책에 올인한다. 정의당 4대 공약의 세 번째가 ‘주거’이면서 동시에 ‘부동산’인 것은 말하자면 일정한 타협이고 후퇴인 셈이다. 
  그래도 담겨야 할 내용은 다 담겨 있고, 짚어야 할 대목은 다 짚는다. 더불어민주당조차 내버린 보유세 강화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천명하며, 공공택지에는 100% 공공주택만 공급하겠다는 공약으로 양대 정당의 대규모 공급 중심 정책에 대응한다. 이 정도는 기존 주거/부동산 논란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다주택 보유를 억제한다는 ‘주택소유상한제 도입’ 공약이나, 주택만이 아니라 토지에 대해서도 과세를 강화한다는 ‘토지초과이득세 도입’ 공약은 그간 주거/부동산 논란에서 간과되던 중요한 쟁점을 조준한다. 
  또 다른 중요한 공약은 세입자 권리를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세입자 안심 시스템’ 구축 공약이다. 자가 보유-대규모 공급 중심 정책들이 억압하고 은폐하는 데다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의 어설픈 주택임대차법 개정 탓에 더욱 무시되고 있는 ‘세입자 권리’ 문제를 겨냥한 참으로 중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역시 내용의 무게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넷째, “시민평생소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의당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경기도지사 시절에 강조한 기본소득 정책이 대선에서 21세기형 복지 체계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했다. 아니, 이를 기대하기까지 했다. 정의당은 이미 전국민소득보험을 구체적인 대안으로 발전시켜왔으며 기본소득 쟁점에 대해서는 현존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을 더욱 발전시키는 ‘범주형 기본소득’을 제안해왔다. 그런데 대선 정책공약집은 이에 더해, 전에 없던 또 다른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시민최저소득 100만원’이다. 
  정의당 당원들도 처음 보는 낯선 정책이라 느낄 수 있지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중위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시민에게 국가가 최저소득 100만 원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모든 시민에게 현금을 정액으로 지급하여 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인데 반해 정의당의 ‘시민최저소득’은 긴급히 생계비를 보장해야 할 계층부터 소득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보수 세력이 흔히 이런 제안을 하면서 기존 복지수당(한국의 경우라면 기초생활보장급여, 장애인수당 등)을 대대적으로 폐지, 삭감하는 통폐합을 주장하는 데 반해 정의당은 기존 소득보장을 대폭 보강하는 시민최저소득 제도를 신설하자는 내용이다. 
  이 시민최저소득 제안과 전국민소득보험, 범주형 기본소득, 일자리보장제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 정의당의 ‘21세기 복지국가’ 구상의 기본 뼈대가 될 만하다. 하지만 역시 쟁점화는 안 됐다. 아마 당원들 가운데에도 아직 이것이 정의당의 대안인 줄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4대 주요 공약 다음에는 정의당 대선 공약들이 부문별로 쭉 나열돼 있다. 4대 공약과 겹치는 내용도 있지만, 그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정책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므로 정책공약집은 어쨌든 한 번은 완독할 필요가 있다. 가령 전국민주치의제도를 비롯한 공공의료 강화 방안이나 지역 국공립대학을 육성하여 대학서열체제 혁파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방안은 4대 공약과 같은 수준의 핵심 공약으로 선정되어도 좋은 정책들이다. 하지만 각각 ‘건강’ 분야와 ‘교육’ 분야에 ‘숨어’ 있다. 
  정책공약집의 특성상, 그 건조한 문체와 방대한 분량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누구나 졸린 눈을 비빌 수밖에 없다. 그래도 보물을 찾으려면 그 정도 수고쯤은 해야 한다. 문제는 유권자들에게까지 이런 수고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3. 전체를 꿰뚫는 철학을 느끼고 싶다. 하지만 ···

  지금까지 내용만 봐도 대선 정책공약집 안에 시대 변화와 그에 부합하는 대안에 관한 고민이 적잖이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린노믹스나 시민최저소득보장 등의 정책들은 과거 총선, 대선 정책공약집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거나, 있어도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이 점에서 이번 대선 공약은 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 공약 이후에 가장 혁신적인, 진보정당 선거 공약이라 할 수도 있다. 이전까지 진보정당 선거 공약이 비록 일정한 혁신을 담고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 공약의 변주였다면, 이번 대선 공약은 단순한 변주를 넘어선 새로운 제안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혁신성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각각의 정책을 차근차근 검토하면 그런 혁신 지점을 확인할 수 있지만, 웬만큼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이를 느낄 수 없다. 불행히도 정의당 정책에 유별나게 관심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꼼꼼히 그리고 ‘해석’까지 해가며 선거 공약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정의당 대선 공약에 담긴 고민과 새로운 시도를 알아채고 인정한 이들은 얼마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즉,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은 자신이 실제 이뤄낸 성취마저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무엇보다 “주4일제 복지국가”라는 핵심 슬로건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정책공약집 제목을 겸했으며, 따라서 정의당 대선 공약의 모든 내용을 꿰뚫는 기본 정신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 정의당이 시민들에게 제시하는 철학과 비전이 구태의연하거나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일단 “주4일제”부터 보자. 이는 노동시간 단축을 표현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진보정당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주요 정책일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라고 어느 때나 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의 배경이 되는 정세와 맞아떨어짐으로써 더 많은 대중이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는 내용을 앞에 내세워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2022년 한국 대선에서 그런 주제였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왜 그러한지를 정의당 스스로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책공약집 안에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후보의 입을 통해서도 그러했다.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을 구체화한 ‘주4일제’라는 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정책공약집에서는 ‘주4일제’라고도 하고 ‘주32시간제’라고도 했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주로 부각된 것은 ‘주4일제’라는 정식화였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집단은 임금 소득자 가운데에서도 상대적 상위 계층인 사무전문직(화이트칼라)이다. 생산직에게는 노동‘일’보다는 노동‘시간’ 중심의 표현이 더 친숙할 것이며, 비정규직이나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주4일제’ 자체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주4일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의당의 비전과 정책을 종합하는 핵심 표어로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주4일제’에 비하면 뒤의 ‘복지국가’는 정의당의 종합 비전을 일정하게 형상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이 말은 신선하거나 선명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아직 복지국가에서 한참 멀지만, ‘복지국가’라는 말만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날카로움을 잃었다. 200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이 말이 ‘진보’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과 중첩되면서 그리되고 말았다. 
  더구나 기후위기에 맞서는 ‘그린노믹스’는 ‘복지국가’라는 말만으로는 포괄되지 못한다. 신노동법도, 일자리보장제도 ‘20세기 복지국가’에서는 없었던 구상이다. 시민최저소득보장 역시 마찬가지다. ‘복지국가’라는 말이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이 거둔 중요한 (내용적) 성취들을 시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는커녕 이런 성취들과 ‘복지국가’는 뭔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어긋나는 면이 있다.
  그럼 어떤 구호를 앞에 내세워야 했을까? 정의당 대선 공약에서 당의 철학과 비전이 선명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려면, ‘주4일제 복지국가’ 말고 무엇을 내걸어야 했을까? 이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런 핵심 슬로건은 선거 앞두고 몇몇 정책 전문가들을 통해 마련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당의 철학과 비전을 시대 상황에 맞게 발전시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당내 토론을 지속해온 정당만이 선거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계기에 자신의 입장을 확연히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당은 그렇지 못했다.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니 분위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심상정 후보가 발표한 정책 중 그나마 ‘주4일제’가 SNS(주로 트위터)에서 일정한 호응을 얻자 자연히 이 그 정책이 부각됐고, 급기야 정의당 대선 공약 전체를 대표하는 위상까지 얻게 됐다. 지난 대선과 이번 대선 사이 5년간 당이 펼친 실천과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대선을 코앞에 둔 몇 주 동안 특정 소셜 미디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감지한 여론이 정의당의 철학과 비전을 좌우한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당의 철학과 비전’이라는 표현은 쓸 수 없다. 그저 이 당에 철학과 비전이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4. 더 공세적이고 진취적일 수는 없었을까? 

  핵심 슬로건이 대선 공약 전체를 제대로 집약하지 못했다고 평했지만, 그렇다고 공약 내용만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책공약집에 담긴 수많은 정책 가운데에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의당 스스로 크게 강조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꼭 필요한 대안인데도 기다란 정책 목록의 한 귀퉁이에조차 실리지 못한 것들이 있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에 손을 대는 내용과 관련하여 이런 문제가 도드라져 보인다. 
  위에 소개한 4대 주요 공약을 실제 추진하려면, 한국 자본주의의 단단한 구조에 균열을 내거나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굳어졌거나 재벌, 금융자본의 이익과 긴밀히 결합해 있어서 건드리기 쉽지 않은 영역들에 과감히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정책 대안은 상당히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실제로도 지배계급의 커다란 반발이나 한국 사회 내 계급 역관계의 격동을 야기하는 ‘급진적’ 성격을 지닌다. 
  정책공약집 안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4대 주요 공약 중 첫 번째인 ‘기후위기, 그린노믹스’에는 녹색투자은행을 통해 대대적인 녹색산업혁명 투자를 단행한다는 공약이 있다. 기존 산업은행을 녹색투자은행으로 전환하고, 녹색채권을 발행해 재정을 확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대규모 공적 투자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공 투자를 통해 새롭게 구축되는 부문에서는 노동자, 소비자/이용자, 지역사회 등이 참여하는 ‘한국형 이해관계자 모델’을 도입하겠다고도 한다. 
  그린‘노믹스’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좁은 의미의 생태환경 정책이 아니다. 기후위기 대책만도 아니다.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존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골간까지도 바꿔나간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녹색투자은행의 공공 투자로 재생에너지 등의 산업 부문이 구축된다면, 재벌의 지배력이나 주식시장의 영향력이 주로 작동하던 영역과는 또 다른 영역이 한국 경제에 대두할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기조가 지배하던 기존 ‘시장’과 다르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기에 구축된 낡은 공공부문과도 다른 특성을 보일 것이다. 가령 정의당 대선 공약이 천명한 대로 ‘한국형 이해관계자 모델’이 시도된다면, 재벌이나 금융자본만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등 다양한 민중 집단이 참여하는 경제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 대선공약집 안에는 이런 함의를 지닌 정책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정의당 자신이 이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당당히 주장하지 못했다. ‘녹색투자은행’은 심상정 후보 공보물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공보물에 한 줄 더 들어간다고 무슨 커다란 차이가 있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하필 그 내용이 빠진 것은 그만큼 정의당 스스로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한편, 꼭 들어가야 했는데, 빠진 내용도 적지 않다. 경제 구조 변화와 관련해서는 기획재정부를 어떻게 할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린노믹스를 추진하든 시민최저소득보장을 추진하든 가장 걸림돌이 될 요소 가운데 하나는 기획재정부다. 이는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들이 버티고 있는 한, 확장적 재정 운용도 할 수 없고 따라서 녹색산업혁명 같은 대안적 영역의 대규모 공공 투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의당은 마땅히 기획재정부 해체를 주장해야 했다. ‘한국형 이해관계자 모델’을 더 공세적으로 전개해 노동자, 소비자 대표 등이 참여하는 일종의 ‘경제 의회’ 같은 기구가 예산 편성 권한을 맡도록 하는 방안을 제창해야 했다. 이것을 대선 쟁점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해야 했다. 
 
  왜 이런 내용이 빠졌을까? 왜 있어도 정의당 스스로 강조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번에도 당의 일상적 준비 부족을 들지 않을 수 없겠다.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정책 내용일수록 몇몇 정책 담당자가 아이디어를 내는 수준에서는 당의 공식 입장이 될 수 없다. 그렇게 갑자기 마치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처럼 제시된다면, 지역조직과 당원들 사이에서 혼란과 동요만 낳을 것이다. 역시 평소에 각 당부와 당원들의 실천 속에서 고민하고 토론해가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밟았을 때만 아무리 ‘급진적’인 내용이라도 당 전체가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다. 이럴 때만 후보 또한 확신을 갖고 입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당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5. ‘다당제 민주주의’, 그게 최선이었을까?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내세운 주요 담론 가운데 하나는 “다당제 민주주의”였다. 올해 대선은 어느 때보다 양대 정당의 구심력이 강했던 선거였다. 심지어 2012년 대선보다도 강했다. 이런 구도에서 소수정당 후보가 존재를 드러내고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려면, 양대 정당이 독점하는 정치 지형 자체를 공격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회 변혁 이전에 정치 변혁을 설득력 있게 설파해야 한다. 심상정 후보와 정의당 대선 선본도 이를 잘 알았기에 ‘다당제 민주주의’를 강조했고 이에 동의하는 제3세력 후보들이 연대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담론이 힘을 얻으려면, 정책이 보조를 맞춰줘야 한다. 그럼 ‘다당제 민주주의’를 뒤에서 받쳐주는 정치 개혁 관련 공약은 무엇이었던가? 정책공약집은 선거제도 대안으로 진보정당의 오래된 당론인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양대 정당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이미 왜곡한 바 있고 따라서 앞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역시 왜곡할 (비례)위성정당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률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비례위성정당 재발 방지를 덧붙인 것을 제외하면, 전통적 입장을 반복한 셈이다. 
  과거와 좀 다른 대목은 제왕적 대통령제(정책공약집에서는 주로 ‘슈퍼대통령제’라 호명)를 개혁할 방안을 제시한 점이다. 정의당이 처방한 것은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를 점차 분권화하면서 의회중심제, 즉 내각제로 전환할 기틀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국무총리를 국회가 추천하고, 국무총리가 내각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간 진보정당조차 현재의 제6공화국의 대통령 중심 헌정 구조에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는데, 이 점에서 진일보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당제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관심과 지지를 호소한 데 비해서는 정치 개혁 공약들이 그다지 진취적이고 전향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비례위성정당 사태를 겪고 났는데도 여전히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소 나태해 보인다. 사법부조차 위법이 아니라 판단했는데, 한 번 물꼬가 트인 비례위성정당을 과연 법률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금지할 수 있을까? 비례위성정당이 명백히 정치적 현실로 인정받은 한국 상황에서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더는 대안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럼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따지기 전에, 일단 정책공약집에서는 이런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 개혁 방안도 그렇다. 기왕에 ‘의회중심제’까지 언급했다면, 헌법을 사실상 제헌 수준으로 크게 개정하는, 정치 변혁 수준의 대안과 기획을 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칠레처럼 기존 국회가 아니라 헌법개정시민회의를 따로 구성해 헌법을 대폭 개정하고 제6공화국을 넘어 새로운 공화국으로 나아가자고 제시해야 하지 않았을까. 
  정의당은 그리 하지 않았지만, 한국 대선 한 달 뒤에 실시된 프랑스 대선에서 급진좌파 대선 후보 장-뤽 멜랑숑은 그렇게 주장했다. 제헌회의를 새로 구성해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질서를 넘어서는 새 공화국 헌법을 마련하자고 공약했다. 되도록 내각제와 비례대표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 정치 질서를 수립하자고 했다. 정의당을 비롯한 한국 진보정당들이 배워야 할 대목이다. 
  그럼 심상정 후보와 정의당 대선 선본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왜 더 적극적으로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넘어서는 정치 혁명을 주창하지 못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도 위와 거의 동일한 답을 내놓아야 하겠다. 정의당은 한 번도 대통령제가 아닌 의회 중심 체제에 관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비례대표제에 관해 당원 토론을 벌인 적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당내의 어떤 유력 정치인이라도, 어떤 경향이나 정파라도 낯선 정치 대안을 갑자기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멜랑숑은 평소 신념이 있었고, 그래서 이미 2010년대 초부터 ‘제6공화국 운동’을 이야기하며 대중을 설득해왔다. 정의당은 그렇지 못했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6. 당 정책 혁신 이전에 당 정치 혁신이 필요하다

  총평을 하자면,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은 일단 몇 가지 중요한 영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복지, 노동, 기후위기 대책 등에서 2020년대에 꼭 필요한 진보정당 정책 혁신을 일정하게 이뤄냈다. 시민최저소득보장제나 신노동법 등은 이후 계속 진보정당 대표 정책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 더는 과거의 정책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결정적인’ 혁신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은 전반적 측면에서는 ‘미완성’이라 해야 하겠다. 만약 정의당이 집권하여 공약을 추진할 경우에 정책 전반이 실제 뿌리를 내리고 서로 얽혀 유기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함께 갖춰졌어야 할 내용들이 공백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요 4대 공약에 담긴 정책들을 관철하려면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단단한 구조들에 손을 대야 하는데, 그러한 구조개혁 전망이 모호하거나 생략돼 있다. 또한, 사회 변혁이 가능하게 하려면 우선 낡은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넘어서는 정치 변혁이 필요한데, 정치 개혁의 수준이나 내용이 여전히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즉, 정의당이 앞으로 더 채워 넣어야 할 정책은 정치 변혁 비전이고,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을 조준하는 구조개혁 전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직시해야 할 것이 있다. 이런 내용들은 결코 몇몇 정책 전문가가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뛰어난 전문가가 있어 그 초안을 준비하다 하더라도 당 전체가 이를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함으로써 확신에 이르기 전에는 당론이 되기 힘들다. 정의당에 바로 이런 활동이 없다면, 이번 대선 공약에서 누락되고 생략된 부분은 영원히 공백으로 남을 것이다. 
  이는 이 글에서 정책공약집의 주요 내용을 검토하며 반복하여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정의당의 20대 대선 공약에서 뭔가 미진하거나 부족함이 확인된 대목들은 대개 이를 채워 넣는 데 꼭 필요한 당의 일상적 토론과 실천이 없었던 사정과 관련돼 있다. 
  즉, 문제는 정의당의 정책 자체가 아니라 그 토대가 되는 정의당의 정치다. 정책의 문제나 한계도 결국은 정치의 문제나 한계가 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면, 정의당의 정치가 혁신되지 않는 한, 정책 역시 더 혁신되기 힘들다. 정의당 제20대 대선 공약은 정치가 혁신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 차원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혁신의 최대치 혹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더불어민주당, 2022, 앞으로 제대로: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
https://theminjoo.kr/board/view/election/750548. 
정의당, 2022, 주4일제 복지국가: 제20대 대통령선거 정의당 정책공약집.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html?bbs_code=JS56&num=147825. 
정의당, 2020, 정의로운 대전환: 제21대 총선 정의당 정책공약집.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html?bbs_code=JS56&num=129935. 
진보당, 2022, 당신의 땀이 빛나도록 –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 혁명: 제20대 대통령선거 진보당 정책공약집.
https://jinboparty.com/pages/?p=246&b=b_1_113&bg=&bn=7097&cno=&m=read&nPage=1&cate=&nPageSize=20&f=ALL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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