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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

[정의로운 경제] 전환의 시대, 상식은 새롭게 구성된다

  • 입력 2021.08.30 13:45      조회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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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적인 가족이라는 것이 있을까

“역사적 위기국면에서 기대할 수 있는 한 가지 희망은, 기존의 진리를 뒤흔들어 대전환의 가능성을 열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에는 공존하는 상식들을 끌어다 쓰는 방식마저 종종 바뀌게 된다.”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저술한 <디그로쓰(산현포럼)>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대선과 같은 큰 정치 이벤트가 있는 시절이면 의례 ‘시대정신’이 뭔지를 묻는다. 어쩌면 지금 시대는 ‘기존의 상식이 흔들리고 전복되는 시대’일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가 오랫동안 확고하게 믿고 의지해왔던 상식들이 뿌리로부터 무너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회적 준거인 ‘가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함의 안개 속에 빠져드는 것이 아닐까?
 


그림1.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중 변화 (출처 : 통계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우리나라 1인 가구는 6백만 가구를 넘었고, 비중으로도 30퍼센트를 넘어서 이제 확고부동한 1위의 ‘주류 가구형태’가 되었다. 2015년에는 27퍼센트를 조금 넘었다. 2010년에는 24퍼센트, 2005년에는 20퍼센트였다. 15년만에 무려 10퍼센트 포인트가 증가했을 정도로 정말 급격한 변화다.

이제 과거에 우리가 알던 상식인 ‘4인가구’는 고작 20퍼센트도 안되는 4번째 정도로 많은 비주류적 유형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1인가구가 특정 연령대만 몰려 있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30대, 여성은 20대와 60대에서 다소 많기는 하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구의 주류 형태를 ‘1인가구’ 또는 ‘1,2인가구’로 상정하고 모든 공적 정책을 짜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1,2인 가구 위주로 정책이 치중되어 나중에는 ‘4인가구가 소외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표준적 노동이란 무엇인가?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확고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노동자’라는 계급 집단을 어떻게 구획할지에 대해서도 최근 표준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에 취업한 노동자와 자기 사업을 하는 사업자가 비교적 명확했다. 하지만 노동자들 가운데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불안정하게 되면서 비정규직,하청, 외주 등이 파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늬만 개인사업자인 특수고용, 그리고 최근 플랫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최근 전통적인 노동자와 사업자 사이에 무수한 형태의 ‘노무방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규모도 수백만에 이를 정도로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림2. 정부 통계상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 (출처 : 김종진)

일하는 방식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노동자이면서 노동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들, 전통적인 고용관계에 토대해서 만들어진 사회보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의 비중이 급격히 팽창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코로나19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전통적인 고용관계 밖의 노동을 단계적으로 포괄하는 방식이 한계에 직면하자 이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노동자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을 노동자로 불러야 하는가?

누가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최근 아프칸 사태로 국제사회에서 ‘난민’의 수용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과 달리 지난 26일 아프칸 난민 380여명을 받아들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통상적인 ‘난민’이 아니라 ‘특별기여자’로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다. 난민이라는 용어가 갖는 거부적 정서를 감안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에서 체류하는 외국인 지난 2013년에는 150만을 넘었고, 2019년에는 250만을 넘었다. 해마다 다문화 출생아도 1만 8천 명 정도로 전체의 6%에 달한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서 2013년에는 난민법을 만들어 난민지위 인정절차 등을 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난민 인정비율은 고작 1.3퍼센트란다. 미국이나 영국이 25퍼센트를 넘는 것에 비하면 극도로 적은 수치다. 이에 대해 청년정의당 강민진 대표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잘 살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었는데도 세계적으로 난민수용을 안하는”나라라고 비판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 국민이 될 자격은 어떻게 부여받는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매우 자연스럽게 핏줄을 그 자격요건으로 간주한 것이 아닐까? 한국 국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그래서 가족관계 증명서에 기재가 되면 자격을 얻는 것으로 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경제활동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며,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묻지 않은 채로.

상식은 새롭게 씌어질 수 있다

가족과 노동, 국민이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만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지구는 자원의 채굴 대상‘으로만 간주했지 ’지구의 감당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자원을 채취하면서 자연을 파괴해도, 배출가스와 오염수를 배출하면서 환경을 파괴해도 ’외부비용‘이라는 산식에 숫자를 얼마나 넣어주면 될지 고민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구의 감당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경제는, 인간의 경제활동규모가 거대한 지구 크기에 비해 보잘 것 없었던 시기, ’큰 지구 – 작은 경제‘의 시기였던 2차 대전 이전 세상의 상식이었을 뿐이다. 1950년대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시대가 되면서 그 상식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인구와 경제규모가 동시에 폭발하면서 이제 ‘작은 지구 – 큰 경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직접적으로 지구 한계선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지구한계를 위협하는 경제활동의 대표적 징표다.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이 여기에 있다. 기존 경제상식을 대변해 온 GDP중심 성장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커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존 상식이 흔들리는 시대, 새로운 표준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 그런 시대를 많은 이들은 전환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 이 글은 '레디앙'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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