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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정의로운 경제] 기후위기의 미래, 가능성과 불가능성

탈-탄소사회로의 전환,?위기의 시간에 꾸는 유토피아의 꿈
  • 입력 2021.08.01 10:00      조회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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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난제 기후위기, 그조차 10년 앞당겨졌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황제사면’이 전격 결정되고, 논란의 소지가 큰 언론중재법에 한국 정치권이 에너지를 쏟고 있는 사이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슈는 따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했던 기후위기가 예상보다 10년 정도 앞당겨지고 있다는 심각한 경고가 나와서 세계 기후운동가들은 물론 정치권마저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책임 있는 국제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13년 이후 8년 만에 기후위기를 종합적으로 재평가하는 여섯 번째 보고서(첫 번째 부분)를 지난 8월 9일 발표했는데 거기에 실린 내용이 그랬다.

보고서는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활동, 특히 화석연료 남용으로 인한 대량의 탄소배출 때문’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 나아가 유엔이 목표로 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한계선(지구평균기온 추가상승 1.5도 이내)에 도달하는 시점이, 지금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무려 10년 정도 앞당겨져서 늦어도 2040년 이전이 될 수 있다는 실로 엄중한 경고까지 나왔다. 현재 지구 평균온도는 이미 산업혁명 대비 1.09도까지 올라간 상태다.
 


그림1. (출처 : IPCC)

최근 200만년 동안 전례가 없다는 현재의 기후위기가 만약 1.5도 한계선을 넘어가 버리면, 과거 50년에 한번 일어났던 극한고온이 무려 8.6배나 많이 일어날 수 있고, 2도마저 넘어가면 무려 14배가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진단이다. 또한 지금 이대로라면 지구평균 온도는 세기말까지 최대 5.7도까지 상승할 수 있고, 해수면은 최대 1m이상 올라갈 수 있다는 경고다. 영국 국영방송 BBC의 지적대로 기후위기가 더는 머뭇거릴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최악의 재난단계, ‘코드 레드’에 왔다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

IPCC보고서에 따르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보고서는 인류가 지구 기온 상승폭을 1.5도 이하로 유지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으며, 여기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전 지구 지표면 온도 상승을 안정화하는 데 전지구의 탄소중립 달성은 필요조건”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탄소중립이라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도 충족시켜서 기후위기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지난 8월 5일 대통령 직속 2050탄소중립위원회가 제출한 세 가지 탄소중립시나리오 초안 가운데 첫 번째 1,2안은 아예 탄소중립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첫째 위기는 여기에 있다. 가는 길은 고사하고 가야 할 목표 자체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도전은 그 다음이다. 설령 탄소중립을 목표로 명시한다고 하더라도 탄소중립으로 가는 길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 많은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난제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탄소중립에 이르지 못했을 때 기후위기로 인한 엄청난 재앙과 그 대처에 들어갈 사회적 비용에 비하면, 탄소중립이 실현되는 ‘탈-탄소경제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이 그나마 가장 가능한 선택이며 가장 적은 비용이 들어가는 경제적 선택지가 될 것이다. 전환비용이 재난비용보다 적다는 뜻이다.

어떤 방법으로 전환할 것인가? 지금 이 길을 두고도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기존 화석연료, 원전 이익 집단들은 지금까지 활용하던 석탄석유나 원전을 계속 사용하기 하기 위해 갖가지 불가능한 기술들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전히 실용적인 수준의 탄소포집기술(CCS)은 검증된 바가 없는데, 그런데도 석탄화력발전을 미래까지 존속시킬 목적으로, 석탄화력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를 포집기술로 최대 1억톤 가깝게 재흡수하겠다는 것이 2050탄소중립위원회의 현재 시나리오다. 원전의 유지를 고집하는 세력도 마찬가지다. 현행 방식의 원전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자, 역시 설계도 수준에 있는 기술인 소형원자로(SMR)나 심지어 핵융합을 활용한 전력생산으로 기후위기에 대처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 화석연료, 원전이익 집단들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주장은, 태양광과 풍력발전 등 재생에너지 기술 전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가장 놀랍고도 빠른 기술혁신이 있었던 분야는 탄소포집기술이나 원자로가 아니라, 태양광과 풍력, 배터리 등 재생에너지 분야다. 지난 10년 동안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 가격은 거의 1/7수준으로 풍력은 1/3수준으로 가격이 싸졌다. 앞으로 10년 안에 다시 절반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10년 안에 태양광과 풍력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값싼 에너지가 될 것이고 그 때문에 지금 선진국에서 신규발전소의 80%를 재생에너지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득권 집단들은, 태양광으로 전국을 모두 덮어도 전력수요를 감당못할 것이라느니, 재생에너지 폐기물 문제가 심각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근거가 매우 부족한 비판을 하면서 100%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의 불가능성에 집착하고 있다.

물론 재생에너지로 100%전환하는 길에도 수 많은 난제들이 있다. 현재 실리콘 패널방식의 태양광은 설치 장소의 제약이 있다든지, 개선 여지가 여전한 태양광 모듈 효율이라든지, 리튬이온 배터리 등이 갖는 용량과 수명의 한계 등을 일부에서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는 재생에너지 기술혁신 역시 활발하다. 설치 장소의 제약을 상당 부분 극복해줄 박막형 모듈기술인 페브로스카이트 태양광의 내구성과 효율도 계속 진화하고 있고, 이외에도 다양한 태양광기술이 실험되고 있다. 현재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넘어서려는 저장기술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현재 한계를 넘으려는 수 많은 도전들과 미래 전망들에 대해서는 눈감고, 현재의 한계만 부각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탈-탄소경제사회의 가장 큰 도전은 기술이 아니다

만약에 똑같은 수준의 난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기존의 화석연료나 원전을 유지 확대시키는 방안보다, 재생에너지로 완전 전환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탈-탄소사회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굳이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하고 원전을 확대시키기 위해 불가능에 가까운 기술들에 집착하면서도, 재생에너지 기술의 현재적 난점들은 마치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미리 단정하고 있다.

사실 탈-탄소경제 사회로 가는 길에 직면한 장애 가운데, ‘기술적으로 재생에너지로 100%전환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은 아니다. 더 큰 도전은 기술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도전일 수 있다. 지금까지 방식의 경제에서는 화석연료 사용을 완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에만 의존하는 경제로 전환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래에는 지금처럼 값싼 에너지를 무한히 쏟아부어 경제의 빠른 양적 팽창을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태양과 풍력에 의지한 에너지 확대는 무진장한 석탄, 석유, 가스를 채굴해서 마음껏 태우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너지와 자원 소비량을 일정하게 제어하면서 양적 경제성장에 치중하던 경제활동에서 벗어나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자본주의에서 경제의 양적 팽창을 주도했던 기업들의 수익추구 제일주의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화석연료 기반으로 엄청난 돈벌이를 했던 기업들에게 돈벌이 기회를 포기하라는 요구는, 태양광 효율을 두 배로 올리려는 기술적 노력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한때 중형세단을 구입하고, 가정마다 에어컨을 설치하며 육식으로 외식을 즐기는 것이 중산층의 상징처럼 보였던 20세기 일상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서는 탈-탄소사회로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익숙한 삶과 문화를 바꾸는 일은 특히 서민들보다 부유한 이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압박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은 채 기술에 의지해서만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길은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전환시키지 않는다면, 점점 더 현실화되는 기후위기가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바꾸게 될 것이다. 전지구적 기후재난이라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혁신을 넘어 경제와 사회의 불가능할 것 같은 변화를 ‘자발적’으로 시도해야 할 마지막 순간이 지금일 것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르쥬 라투슈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유토피아를 원한다. 유토피아는 꿈꾸도록 하는 어떤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악몽을 꾸는 중이다. 따라서 새로운 꿈이 필요하다.” 지금 기후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유토피아는 과연 무엇일까?

* 이 글은 '레디앙'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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