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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

[손호철 칼럼] 서울은 불타고 있는데…

  • 입력 2023.04.24 10:43      조회 940
    • 손호철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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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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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네로는 비파나 켜고 있다.”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당시 부상하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학’에 대해 한 말이다. 1960년대 말부터 세계는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지속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경제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파리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져간 청년세대의 탈권위주의 68혁명, 미국에서 시작된 반전운동 등 격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학자들은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처방’을 정치학의 중심과제라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규범적 정치학’을 ‘과학’과 거리가 먼 ‘낡은 윤리학’이라고 비판하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신 과학의 전제조건인 ‘가치중립’이란 이름 아래 불타는 세계를 외면한 채 통계학 등 자연과학적 연구수단에 기초한 정치실험에 몰두했다. 정치학자들의 이 같은 모습이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이를 보며 비파를 켜면서 노래를 부른 네로를 닮았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요즘 세계를 보면, 아니 시야를 좁혀 한국 정치를 보면,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판이 떠오른다. 세계는 불타고 있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비파만 켜고 있다. 서울은 불타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등 거대 양당과 ‘주류’ 정치권은 비파만 켜고 있다. 서울과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가 불타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냉엄한 현실이다.

지구온난화로 이 땅의 기후는 이제 온대가 아니라 아열대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최근 들어 유례없는 폭염과 태풍, 극심한 가뭄과 산불, 폭우와 한파 등 기상이변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여러 연구들은 지구의 기온 상승을 1.5도 이하로 묶지 않으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기후위기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기후악당’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1인당 탄소배출량이 세계 5위권이며 아직도 기후위기의 주범 중 하나인 화력발전소를 짓고 수출하는 나라이다.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는 2020년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97%라는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이 결의와 동떨어져 있다. 거대 양당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초당파적인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정쟁으로 날을 새우고 있다. 아니 입으로는 비상대응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기후위기 심화에 앞장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부산지역 지지 확보라는 정치공학적 발상에서 지역 환경단체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생태파괴가 불가피한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등 환경파괴 정책들을 여럿 추진했다.

윤석열 정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21일 발표한 탄소중립 계획안을 통해 재벌 등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해주기 위해 2030년까지 감축해야 하는 산업부문 온실가스 목표치를 14.5%에서 11.4%로 낮추는 ‘개악’을 단행했고, 설악산 케이블카 건설도 허가했다. 한마디로 이 땅과 지구를 지켜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기후악당’이 되고, ‘생태학살’의 주범이 되고 있다. 하다못해 환경부도 환경을 지키는 ‘환경보호부’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다양한 환경파괴 기획들에 면죄부를 주는 ‘환경파괴면죄부’로 변한 지 오래이다. 지난 주말인 14일 350여개 시민단체 활동가 등 3000여명은 기후 관련 정부기관들이 모여 있는 세종시로 달려가 ‘기후정의 파업’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지난달 발표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안’은 기후위기 대응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며 ‘함께 살기 위해서는 멈춰!’라는 구호 아래 지구위기를 향해 돌진하는 정부를 멈추게 하기 위해 하루 동안 일상을 멈추는 ‘1일 기후정의 파업’을 실천했다. 그러나 거대 양당 등 주류 정치권은 이 절박한 호소에 귀를 닫고 일상적인 소모적 정쟁에 바쁠 뿐이다. 답답한 일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세계는 불타고 있는데 비파만 켜고 있는 새로운 정치학자들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두 가지 사실만이 이들의 행동을 용서할 수 있다. 하나는 이들이 비파를 켜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로마가 불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도 한반도가 불타고 있는데 자신들이 비파만 켜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 이 글은 2023년 4월 18일자 경향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 #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