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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여소득, 기본소득으로의 단계인가 사회적 경제의 실현인가
- 입력 2020.12.01 16:11 조회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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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 전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 #복지#기본소득#참여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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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_ 창간준비1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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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참여소득participation income의 개념은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언급되는 경우에도 항상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의 보조물 혹은 그 중간 매개물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고 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참여소득의 개념이 처음 제기된 1996년 이후 사회적 가치, 사회적 필요, 사회적 조달 등을 연구하는 사회경제학social economics이 일정한 진전을 보게 되면서 참여소득의 개념이 보편적 기본소득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철학과 사회의 비전이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2020년 들어 코비드19 사태가 전 세계를 덮치고 각국에서 노동 시장이 속절없이 붕괴하는 위기에 처하면서, 참여소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글은 참여소득의 개념이 제기된 맥락을 간략하게 살펴본 뒤, 그러한 이론적 발전이 벌어지게 된 배경의 ‘사회경제학’의 기초 개념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참여소득이 기존의 사회 복지 정책은 물론 기본소득과도 차별되는 여러 강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코비드19 사태와 생태 위기 및 체계적 불평등이 덮치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구체적인 정치적 실행 계획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2. 참여소득 개념의 제안과 변화
참여소득의 개념을 처음 제기한 이는 사회 복지 정책의 탁월한 연구자로서 정평이 높았던 토니 앳킨스Anthony Atkins이며, 이 개념이 처음 제기된 계기는 1996년 영국 중도 좌파의 이론지인 [폴리티컬 쿼털리Political Quarterly]에서 진행했던 ‘시민 소득citizne's income’ 제안에 대한 논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각종 복지 및 수당 수급에 항상 따르는 재산 조사means-test에 대한 반감이 수급자, 활동가, 연구자 모두에게 있어서 대단히 높았고, 이를 대체할 방법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에 해당하는 ‘시민 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다. 수급자들의 소득과 자산을 철저히 조사하여 일정액이 넘을 경우 수급자들에 대한 교부와 지원을 중지한다는 이러한 오래된 원칙은 무수한 문제를 낳아 사회 복지 정책을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몰아넣는다는 비판이 팽배하였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저축 함정savings trap’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즉 자기 힘으로 일거리를 만들어 화폐 소득을 올린다고 해도 그 액수가 애매할 경우 수급이 끊겨 전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일단 복지를 타먹게 되면 영원히 타먹으려고 든다”는 19세기 이래의 오래된 통념이 그대로 현실화 된다는 것이다. 또한 아직 이를 타지 않는 극빈층들은 이러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두렵고 또 낙인 효과가 두려워서 아예 수급 자체를 거부하는 거꾸로의 문제도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시민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 무조건적으로 일정한 액수의 수당을 지급하는 ‘시민 소득’의 제안이 논의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앳킨스는 이러한 ‘시민 소득’ 개념이 제기하는 재산 조사에 기반한 기존 복지 제도의 문제점을 격하게 공감하면서 그 개념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제안이 현실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혹은 정치적인 어려움의 문제를 지적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조건 일정한 액수의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며, 이는 당연히 이 제안이 정치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앳킨스는 ‘시민 소득’의 개념대로 모든 이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무조건’이라는 부분을 ‘조건부’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 조건이란, 수급자가 사회에 무언가 유용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용한 활동’이란 이른바 각국 ‘제 3의 길’ 사회민주당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노동연계복지workfare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자는 복지 수급자들을 궁극적으로 노동 시장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므로 수급의 조건으로서 수급자들이 해야 할 활동으로 노동 시장과 관련된 활동들 - 각종 직업 훈련, 취업 노력 등 - 로 보고 있지만, 앳킨스의 참여소득 제안에서 나오는 ‘유용한 활동’이란 노동력을 판매하여 고용주로부터 화폐 소득을 얻는다는 이러한 노동 시장의 틀을 훨씬 넘어선다. (좁은 의미의 직업 훈련에 제한되지 않는) 각종 배움과 교육 활동,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약자 장애인 등등에 대한 돌봄 활동, 그밖에 사회가 유용한 것으로 인정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들이 모두 인정되며, 이러한 활동들이 화폐 소득을 수반하는지 혹은 ‘제대로 정형화된’ 일자리의 형태를 갖고 있는지 등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질병이나 기타 등등의 명확한 이유로 노동 시장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 이들이도 모두 참여소득의 수급대상으로 포함됨은 물론이다. 앳킨스는 이러한 형태의 ‘참여소득’이라면 ‘시민 소득’에 비하여 훨씬 납세자들을 납득시키기도 쉽고 따라서 정치적인 실현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앳킨스의 참여소득 제안은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보편적 기본소득 주장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으로 국제기본소득네트워크 BIEN의 공동 창립자이자 대표적인 이론가의 하나인 필립 반 파레이스는 참여소득이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나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징검다리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이 때문에 참여소득은 많은 경우 보편적 기본소득의 좀 더 희석된 버전, 혹은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징검다리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가 여러 한계와 모순을 노정하면서, 경제를 시장 중심이 아니라 사회 중심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보다 총체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총체적인 ‘좋은 삶’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고민하는 사회경제학social economics의 관점이 발달되면서 참여소득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개념과 독립적으로 그 스스로의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는 개념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즉 지금까지 국가와 시장이라는 정치경제학의 이분법에 갇혀서 한 번도 제대로 경제 활동의 주체로 여겨져 본 적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서, 그것을 위한 개인과 집단의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방법으로서 참여소득을 재발견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착목해야 할 아주 중요한 주장이 크리스티안 페레즈-무노즈Cristian Perez-Munõz의 글이다. 그는 참여소득의 개념을 놓고 다시 [폴리티컬 쿼털리]에서 2018년 기획한 특집호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참여소득의 개념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unmet social needs’를 충족하도록 사람들의 활동을 독려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으며, 이것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개념으로 제대로 담보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는 중요한 성격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노동 시장에서의 취업으로만 자신의 경제 활동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아무도 돈을 내고 고용하여 공급하려고는 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다종다기한 활동으로 눈을 돌리고 또 스스로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정책 수단인 동시에 소득 이전 정책이 결합된 경우라고 그 독자적 적극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고, 또 보편적 기본소득 진영에서도 불만을 표하는 논자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 어떤 면에서 어떻게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 바람직한가를 차근차근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참여소득의 개념이 개진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노즈의 논지의 뒷 배경이 될 수 있는 사회경제학의 개념틀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사회적 필요, 사회적 조달, 사회적 가치
경제사상에서 가치론value theory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분야이지만 사실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가장 두드러졌던 이론은 상품의 생산 과정에 들어간 비용으로 가치를 설명하는 생산비설과 이를 노동 시간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고전파의 가치론, 그리고 재화 및 서비스를 구매하는 개개인들이 어느 만큼의 주관적 만족을 얻는가라는 신고전파의 효용가치론 정도이다.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가치론은 그 둘의 종합 혹은 절충이라고 할 마셜의 설명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가치론 모두 ‘가치’라는 것이 어떤 물품이나 행위가 갖는 자연적 성질과 속성으로 설명되거나, 그것으로 개인의 마음 속에 발생하는 쾌락의 크기로 설명된다고 하는 ‘자연주의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 즉 ‘가치’라는 것이 개인은 물론 사회와 집단의 행태와 의지와는 무관하며 ‘객관적’으로 측량될 수 있는 모종의 크기라고 가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20세기 시작 무렵 토스타인 베블런은 이러한 관점을 넘어서서 (비록 그가 쓴 용어는 아니지만) 사회적 필요, 사회적 조달, 사회적 가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인으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태고적부터 항상 집단을 이루어 생활해 왔고 개인이란 항상 그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이란 언제나 그 집단이 공유하는 ‘집단적 문화’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집단 전체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는 물론이며, 개인이 무엇을 욕망할지 또한 ‘집단적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돼지고기가 중국에서는 높은 가치를 갖지만 무슬림 사회에서는 폐기물에 불과한 이유는 그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도 그것을 구워 기름장을 찍어 먹은 개인의 혀에 솟아나는 침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집단적 문화’ 즉 ‘사회적 필요’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필요’는 어떻게 충족되는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수단과 방법ways and means 즉 각종 공학적 사회적 기술에 의해 충족된다. 이러한 ‘사회적 조달’은 앞의 ‘사회적 필요’와 서로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관계를 맺는다. 우마차를 몰던 시절에 하늘을 나는 욕구와 필요는 아예 나올 수 없으며, 반대로 면화 옷을 입고 싶은 사회적 필요가 높아졌던 18세기 영국에서는 방적기 방직기의 기술이 폭발적으로 혁신을 이루다가 마침내 증기기관과 산업혁명까지 불러왔다. 따라서 이 ‘수단과 방법’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 조직되는 것이지 기계나 장비 자체의 속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반도체는 15세기 농경 사회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활자 기술 또한 책 읽기 싫어하는 양반들의 조선 사회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회적 가치’는 바로 이 ‘사회적 필요’와 ‘사회적 조달’의 양자가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세계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18세기 이전의 사회에서 황금이나 면화 같은 물건들이 지역마다 나라마다 가치가 천차만별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사회적 가치’란 ‘개인적 집단적인 “좋은 삶”에 필요한 것을 당대에 사용 가능한 자연적 사회적 기술로 조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투입과 산출의 비율’이라고 거칠게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학의 폭넓은 관점에 서서 보게 되면, 영리 기업의 수익성이라는 원리로 조직되는 기존의 노동 시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 한계가 보이게 되며 왜 대안적인 사회적 노동 및 조달의 조직이 필수적인지도 보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어떻게 산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참여소득의 의의를 사회적 필요의 충족, 사회적 조달 활동, 가치 산정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각각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3. 사회경제학의 관점에서 본 참여소득의 세 측면
1)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를 발견한다
이것이 페레즈-무노즈가 강조하는 측면이다. 노동 시장을 조직하는 주체는 영리 기업이며, 그 배후에 있는 투자자이다. 이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산가치의 증식이라는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이들로서, 그들의 활동에 의해서 사회 전체의 집단적 개인적 삶에서 필요한 것들이 모두 충족되는지는 오로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 전체에서 아무리 절실한 문제들이 있다고 해도 첫째, 그것이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상품화의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둘째 그렇게 해서 이윤이 남는지라는 두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는 부지기수라는 말이 한참 부족할 정도로 많다. 부유층 자제들의 학력을 올려주는 ‘필요’는 노동 시장에 의해 넘치게 과할 정도로 충족되고 있다. 하지만 하위 70%에 해당하는 ‘영어포기자’ 및 ‘수학포기자’ 학생들의 학력 증진을 위한 교육의 조달은 어떠한가? 이는 단순히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영어와 수학적 사고를 길러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학생의 70%의 실력을 지금처럼 방기하는 교육 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영포자’ ‘수포자’들을 위한 특별 교육을 조달해야 한다는 사회적 필요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개개인들이 그러한 특별화된 교육의 댓가를 화폐로 지불할만큼 소득이 크지 않다면, 이러한 사회적 필요는 영리 기업과 시장 경제로 조달되지 못한다.
이러한 이른바 ‘시장의 실패’를 해결하는 것은 국가/공공부문의 몫으로 되어 있으니, 이를 통해 조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부문이 기본적으로 세금을 자원으로, 의회의 동의를 기반으로, 관료적 행정을 방법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기껏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영포자’ ‘수포자’에 대한 ‘나머지 공부’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왜 지금까지 현실화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무수한 사회적 필요가 존재하지만, 이를 조달하는 ‘사회적 기술’인 영리기업/시장 경제와 국가/공공부문은 조달할 수 있는 것의 범위에 있어서 확연한 한계를 갖는다. 이 때문에 무노즈가 말하는 ‘충족되지 않는 사회적 필요’가 무수히 생겨난다. 특히 지금과 같이 산업 사회 전체가 기술적 생태적 사회적으로 격변을 겪고 있는 순간은 이러한 문제가 더욱 격심히 일어난다. 영리기업/시장 경제는 오로지 수익이 나는 투자에만 골몰하며, 국가/공공부문은 이 새로운 사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다. 그 와중에 생태 위기는 파상적으로 쳐들어 오며, 불평등은 극심해지며, 그 결과 무수히 많은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의 삶의 고통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필요’를 발견하기 위한 대안적인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참여소득은 바로 이러한 필요와 요구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막연하게 각자가 하고 싶은 활동을 아무 것이나 하고서 ‘사회에 기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회에 대한 기여’로 인정할 수 있는 활동의 종류와 내용이 무엇인지는 여러 연구 조사와 대중적 토론 및 합의를 통하여 만들어 내가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바로 ‘충족되지 못한 사회적 필요’를 발견하는 과정이 된다. 즉, 참여소득은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제도화하게 된다는 이점을 안고 있다.
2) 인간 활동의 종류를 사회적으로 다양화한다
‘노동’이라는 개념에는 실로 여러 가지 측면과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서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보람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노동 시장은 이미 칼 마르크스 이전에 아담 스미스부터 지적했던 바, 인간을 소외시키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노동 시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구매자인 고용주/투자자가 제시하는 요구와 기대에 철저하게 부응하여야만 한다. 그들이 수행할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강도는 철저하게 고용주/투자자에 의해 결정되며, 이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그야말로 ‘기업 수익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인정된다.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노동의 용감한 신세계]에서 앞으로의 산업 사회는 이러한 인간 활동의 단조로움을 넘어서서 ‘다양한 활동이 인정되는 사회multi-ac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간은 기업이 요구하는 활동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활동을 할 능력이 있으며 또 현실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실제로 그러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양한 인간 활동의 폭에서 노동 시장이 인정하는 인간 활동의 폭은 극히 좁다. 그리고 그 좁은 폭 안에서 경쟁에 밀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그 다양하게 많은 활동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비하하는 일이 잦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노동 시장에 성공적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리면서 자기 스스로의 ‘인간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다.
사회적 필요를 조달하는 활동은 영리 기업에 수익을 안겨주는 활동보다 훨씬 그 폭이 넓고 깊다. 그리고 그 인정의 잣대 또한 고용주/투자자를 얼마나 만족시켰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얼마나 부응했느가이다. 따라서 돌봄, 자원봉사, 교육 및 피교육, 노력 봉사 등 실로 무한히 다양한 활동들을 범위로 포괄하게 되며 그 인정의 기준 또한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와는 다르게 된다. 이는 일하는 사람의 자기 평가self-esteem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훨씬 더 다변화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서게 함으로써 노동 시장 이외의 방법으로도 이들을 사회로 통합시켜낼 수 있게 된다.
3) 참여소득 회계의 기준으로서의 ‘여러가지 사회적 최소한’을 활용한다.
참여소득에 대하여 개진된 가장 대표적인 반론은, 이러한 사회적 필요를 찾아내고 또 거기에 부응할 수 있도록 사회적 활동을 조직하며 여기에 적절한 액수의 참여소득을 산정하고 교부하는 일련의 과정이 어마어마한 행정 나아가 정치의 부담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참여소득을 조직하고 실행하는 주체를 설령 정부 관료기관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의 여러 조직이나 마을 기업 등 풀뿌리의 여러 단체 및 조직들까지 포괄하여 설정한다고 해도, 사회적 필요의 발견과 조달 활동의 조직과 적정한 액수의 산정까지 해나간다는 즉 ‘사회적 가치’를 산정해낸다는 일이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경제학자 칼 윌리엄 캅이 제기했던 ‘여러가지 사회적 최소한social minima’의 개념을 활용할 수 있다. 캅은 인간의 욕구를 내용적으로 무차별하게 보아 양적인 크기로만 환원하는 공리주의의 효용가치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욕구를 놓고 그 중요성을 따져 명확한 서열을 부여해야 한다고 본다. 즉 사회적으로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욕구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러한 욕구를 조달하는 것이 경제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최소한에는 결코 의식주와 같은 생리학적인 필요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사회의 성원으로서 통합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 나아가 자신의 인간 발전까지 꾀할 수 있는 수단도 포함되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회적 최소한’의 개념을 중심에 놓는다면, 사회는 스스로 국가와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자적인 경제적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여러가지 최소한’ 중 지금 만족스럽게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들을 잡아 ‘사회적 필요’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충족한다는 목적을 놓고서 지금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참여소득 활동의 범위와 종류가 무엇인지를 구체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중심에 놓고서 이 ‘여러가지 사회적 최소한’을 보장하기 위한 참여소득의 활동들이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인 회계를 할 수도 있게 된다.
4. 참여소득의 독자적 정체성
우리는 지금까지 앳킨스가 처음에 제기했던 참여소득의 개념이 사회경제학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최적의 활동’이라는 개념으로 진화해 온 것을 보았다. 이렇게 되면 참여소득의 개념은 애초의 탄생과는 사뭇 다르게 보편적 기본소득의 개념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여러 조건을 달아 노동 시장으로 모든 이들을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기존의 노동연계복지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상극의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다. 전자가 인간의 삶과 활동과 소득을 평가하고 인정하는 최고의 유일무이한 장치로서 노동 시장을 놓는 데에 반해서, 후자는 인간의 삶과 활동과 (최소한의) 생계가 노동 시장과 완전히 분리되어 순수한 정치적 시민권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분명히 상극으로 보이는 이 두 입장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회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결정과 판단을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 혹은 선택에 맡긴다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관점이다.
노동연계복지의 경우에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노동 시장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인 고용주/투자자와 임노동자가 계약을 맺는 장’일 뿐으로,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실재라고 할 수 없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경우, 인간의 삶과 활동과 (최소한의) 생계를 노동 시장과 단절해야만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인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노동 시장의 횡포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 이후에 사회가 그 개개인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개개인들의 재량으로 맡겨진다는 점에서 자유지상주의의 관점이 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필요가 무엇인지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와 아무 상관없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또 그것을 받은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할지 - 영어 공부를 할 지 양양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할지 - 는 완전히 개인의 재량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귀결로서 또 어찌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도대체 그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애매한 문제로 남게 된다.
어느 제도가 우열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여소득이 이 점에서 보편적 기본소득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제도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참여소득의 개념은 그 중심에 ‘사회의 실재’가 버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활동과 생계를 ‘사회 실재’의 한 기능적 일부에 불과한 노동 시장에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을 결단코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보편적 기본소득과 달리 참여소득을 받는 이들의 활동과 사회의 결핍된 필요를 결합시키기 위해 적극적이고 활발한 토론과 조사를 행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참여소득의 액수 등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풀고자 하는 것이다.
앳킨스와 반 파레이스 등의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러한 참여소득이 실현될 경우 이것이 언젠가 보편적 기본소득이 전면적으로 실현되는 ‘포스트 노동시장’ 사회로 가는 효과적인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징검다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참여소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보편적 기본소득이 지향하고 있는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복잡한 이념과 정치 사회 사상의 문제가 되므로 더 이상 논하는 것은 멈추고자 한다.
5. 맺으며: 참여소득을 지금 당장 시행하자
앳킨스가 애초에 참여소득을 주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정치가들과 납세자들을 납득시키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지점으로서, 이를 잘 활용한다면 참여소득은 어떤 먼 미래의 극적인 정치적 변혁이나 결단을 기다리고 준비할 필요없이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여러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서 쓸 수 있게 된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폐지줍는 노인들에게 참여소득을 지급하자. 지금 그분들이 하루 종일 위험하고 고된 일을 하여 고물상에서 지급받는 돈은 아마도 천 원짜리 몇 장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이 과연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 평가일까? 이 몇 천원이라는 액수는 오로지 그 고물상이라는 영리 업체의 수지 타산에서 계산된 비용일 뿐, 이분들이 사회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이분들 덕분에 동네 골목이 너무나 깨끗해졌으며, 쓰레기 재활용의 정도가 훨씬 더 개선된다. 또한 이분들이 이러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질 노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보건 등의 문제를 크게 덜어주고 있다. 각자도생 약육강식을 외치는 정글이 아니라면, 생계가 막막한 노인들의 삶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는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이다. 그 점에서 이분들이 행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서는 참여소득을 지급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출발해 본다면, 지역마다 또 업종마다 절실히 필요한 데 시장도 국가/공공부문도 만족스럽게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필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겠다고 나서는 활동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소득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온 세계와 대한민국에서도 ‘그린뉴딜’과 ‘전환’의 소리가 드높다. 지금의 생태위기 및 여러 사회적 위기를 위해서는 산업과 사회의 과감한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 ‘뉴딜’의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그 원조격이라 할 1930년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근로 사업도 이 참여소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이 내팽개쳤지만 사회적으로는 소중한 미술가들과 연극인들에게 소득을 보장하고 미국 전역에 벽화와 연극 공연을 행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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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rgen De Wispelaere and Lindsay Stirton, "The Case Against Participation Income—Political, Not Merely Administrative", The Political Quarterly 89(2),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