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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보장제

[정책과 서평39] 지금 청년들의 마음과 90년전 실업자들의 마음.

마리엔탈 마을 노동자들의 대량 실업과 '일자리 보장제'
  • 입력 2021.12.18 10:00      조회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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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나 미래, 희망이 없고, 아주 기본적인 생필품 말고는 어떤 욕구도 극도로 제한되지만, 그래도 동시에 살림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전반적으로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최근  'N-포세대'들이 '소확행'에 만족하면서 살려는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이는 무려 90년 전에 오스트리아에 살던 장기실업자들을 표현한 것이다.  많이 놀랍다. 90년 전 장기실업자와 지금 청년들의 마음상태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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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에서 32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 '마리엔탈'. 
방적.방직 공장등 섬유관련 공장들에 의지해 먹고살던 그곳 주민들이 1929년까지는 그다지 힘든 시절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1929년 하반기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이 오스트리아까지 덮친 모양이다. "1930년 2월에는 방적기가 전부 멈춰섰고, 곧이어 공장 안 터빈이 가동을 중단했다."  

공장도시 전체가  긴 실업상태에 빠져 마리엔탈은 졸지에 '실업자 도시', '완전히 실업상태가 된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비극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수년간 계속되는 '장기실업'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마을이 특별했던 것은 또 있다. 1929년 이전인 1920년에 다행히 실업급여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업기간 동안 노동을 한 이력이 입증되면 곧바로 급여는 취소되는 매우 엄격한 것이지만.  어쨌든 온 마을 성인들이 대량실업에 빠진 후에, 그래도 이들에게는 반년 정도는 실업급여로, 그리고 이후 또 다시 반년정도는 실업급여의 80%정도가 되는 긴급지원이 제공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적어도 1년 동안은 실직자로서 실업급여와 긴급지원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그마저도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엇다.

이처럼 한마을 전체(주민의 3/4인 1,200명)가 실업에  빠져들게 된 상황에서, 가장들이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실업급여에 의존해 살아가는 마을의 모습이 역사적 기록으로 생생하게 포착될 운명을 맞는다.  1931년에 오스트리아 출신 세 명의 사회학자가 다른 이들과 함께 약 4개월을 이 마을에 들어가 478가구를 직접 관찰을 하고 보고서로 만들었던 것이다.  

보고서의 출판물은 독일에서 1933년에 처음나왔지만 막상 유명해지기 시작해진 것은 1960년 독일에서 재발행되고 1971년 영어판이 나온 이후란다. 그 전설적인 책이 최근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이라는 이름으로 드디여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다.  짧은 보고서인데도 내용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매우 가치가 높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몇가지 인상깊은 꼭지를 요약해보련다.



1)시간이 많으니 서로 공동체 활동이라도 열심히 참여했을까?

온 마을이 실업에 빠진 주민들은,  서로의 공통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었을까? 그런데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사회민주당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고 마리엔탈에도 사회민주당원이 제법 있었지만, 공동체는 무너져가고 주민들이 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정도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오솔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잔디밭은 엉망진창이다. 마리엔탈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시간이 남아돌지만 아무도 공원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면 시간이 남아도는 실업자 주민들은 도서관에와서 독서활동을 활발하게 했을까? 전혀 아니다. 2년 사이에 도서 이용이 절반으로 줄었다. 시간이 남아도는데도 독서에 대한 관심은 거꾸로 줄어들었다. 신문 구독자도 이 기간 60%나 감소했단다.  정치활동도 감소했다. 오히려 서로 불신을 부추기는 고소고발 사건만 늘었단다. 

이런 결과를 보건데, 어떤 의미에서 실업은 문제해결 의지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 같다. "이제 남은 희망은 없고, 그저 이유도 모른채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저항할 의지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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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실업자들의 마음상태의 변화: 온전한 상태(unbroken)에서 체념(resigned)로, 다시 절망(in despair)에서 냉담(apathetic)으로

이 보고서의 백미는 실업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유형화한 대목에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처음에는 욕구와 기대가 줄어드는 '체념'상태로 들어간단다. "계획이나 미래, 희망이 없고, 아주 기본적인 생필품 말고는 어떤 욕구도 극도로 제한되지만, 그래도 동시에 살림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전반적으로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 상태에서 "성인들은 이제 어떤 구체적인 미래설계도 없다"는 것인데, 이처럼 장기계획의 부재는 체념상태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상태에 빠지게 된다. "절망, 우울, 무기력,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따라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상황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에 좋던 옛날과 현재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 마음 상태도 최근 청년들의 심리상태를 표현했던 구절들도 너무 유사하다. 하나 다른점이라면 지금 청년들에게는 '좋던 옛날'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절망 상태에서 다시 악화되면 '냉담'한 상태가 된단다. "무엇이든 망가지기 전에 손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상태 말이다. "완전한 수동성, 곧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이들에게서는 어떤 변화를 위한 에너지도 만들어지기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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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실업자들에게 "여가시간은 비극적인 선물"

흔히 기성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직장에 취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요인은, <일하는 것과 여가를 즐기는 것' 사이에서 각자가 선호를 반영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무차별곡선으로 표시한다.  좀 심하게 말해서 실업이 된 것은 일하는 것보다 여가를 즐기기로 각자가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이런 무식한 발상은 진짜 실업자들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엔탈 성인들이 대량 실업이 되어 모두 엄청난 여가 시간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들은 그 시간을 정말 즐기고 있을까?

"마리엔탈 노동자들은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유인을 상실하고 있다. 이제 어던 압박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며, 질서 잡힌 생활에서 벗어나 점점 아무 규율 없고 공허한 생활로 빠져든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진단한다(사실 처음에 이들은 1918년 확립된 8시간 노동제 이후 여가시간을 노동자들이 어떻게  누리는지를 조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 "자유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조건을 알면 누구나 그 시간을 잘 궁리해서 활용한다. 반면 시간이 남아돈다고 느끼면 시간을 활용하려는 노력 자체가 쓸모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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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모든 여성은 일생에 한번도 실업이 된 적이 없다?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온 마을이 실업에 빠진 상황에 남성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에도, 여성들은 식사준비하고 아이들 챙겨주고 집 청소하고 옷가지 수선하는 등 상당히 빡빡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여성들은 가사노동이라는 노동의 짐을 늘 달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사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의 구성원인 한 실업에 빠질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은 살림을 꾸리는 일만으로도 하루 전부를 써야 한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목표가 분명하며, 정해진 작업과 기능, 의무가 많아져서 매일 반복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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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려 했던 것은 정의당의 '일자리보장제'를 더 깊이 파보려는 의도 때문이다. 확실히 실업은 그 무엇보다 국가가 막아야 할 사회적 재난이라는 사실이 이 보고서에서도 명확하다. 서문에서 저자는 실업자들의 '기회감소'와 '열망수준의 저하'를 이렇게 표현한다. "장기실업이 무관심 상태로 이어져서 피해자들은 그나마 남아있는 몇 안되는 기회조차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사회가 방치하는 것이 문명사회에서 옳은가? 

저자의 한사람인 파울 라차르스펠트는 1971년 서문에서 "뉴딜시기에 공공사업청"을 세워 대량의 공공일자리를 제공했던 것을 '눈부신 사회적 발명'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을 왜 연구하지 않는지 의아해 한다. 실업을 정부가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공일자리를 창출했던 미국 뉴딜의 경험이 그에게는 매우 인상적이고 소중했던 모양이다.

오늘날  고용불안정이 극도로 심각한 우리 현실에서, 공공일자리를 그저 '허접한 일'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주변이 어떤 상태인지. 왜 그 많은 이들이 '배달 라이더'로 나가는지. 왜 '데이터 라벨러' 일거리를 찾으려 하는지. 왜 90년전 마리엔탈 실업자들의 마음을 표현한 글들이 지금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표현한 글들과 유사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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