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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기후 위기와 파시즘

오늘, 10년 후 발생할 '화석 파시즘'과 '생태 파시즘'의 징후를 본다
  • 입력 2021.05.25 11:00      조회 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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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차 대전 사이의 유럽 역사를 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시즘의 유혹과 공격을 물리치기가 그토록 어려웠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 이미 한 세대 넘게 의회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강력한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만 놓고 보면, 너무도 무력하게 파시즘의 득세와 집권을 받아들였고, 너무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선택했다.

이런 낯선 역사에 당혹해 하다 보면, 쉽게 이런 결론에 이르곤 한다. "100년 전이야 파시즘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그랬겠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역사적 학습을 한 지금이야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실은 2010년대 대서양 양안 여러 나라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바람을 일으킬 때에도 많은 이들의 심정은 기본적으로 이러했다. 국수주의, 배외주의를 내건 극우파의 전진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적어도 노골적으로 파시즘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라 봤다.

2021년 현재, 이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막은 게 결정적이었다. 트럼프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백악관에서 쫓겨나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극우파의 성장이 일단 멈추었고, 이제 지난 10년간은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잠깐 동안의 일탈기였던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한 세기 전에 파시즘의 등장과 성장을 낳은 위기가 지금 동일하게 반복된다면, 위의 낙관적 예상이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1920-30년대 위기와 같지만, 그 양상이 너무도 다르다. 20세기 초의 위기는 단지 인간 사회 시스템의 위기였지만, 지금은 이에 더해 지구 생태 시스템의 위기로 폭발하는 중이다. 팬데믹 등의 다른 생태 위기들을 동반하며 점점 더 거대한 혼란으로 커가는 기후 위기로 말이다.

이 인류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과거의 어떤 경험도 명쾌한 미래의 지도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 가운데에서 다시 파시즘, 즉 문명의 자기파괴의 위험이 엄습하고 있다.

'화석 파시즘'의 현재, '생태 파시즘'의 미래

기후 위기를 배경으로 파시즘이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있다. 화석 자본주의와 기후 위기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저작을 발표해온 스웨덴 학자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이 역시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연구자-운동가 집단 '체트킨 컬렉티브(Zetkin Collective)'와 함께 낸 <흰 피부, 검은 연료: 화석 파시즘의 위험에 대해(White Skin, Black Fuel: On the Danger of Fossil Fascism)>(Verso, 2021, 국내 미번역)가 이런 충격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어느 나라든 신흥 극우파의 대다수는 기후 변화 부정론을 신봉한다. 처음에 이들은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매년 심각한 기상 이변이 반복되자 더는 이런 태도를 고집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이들은 기후가 변화하더라도 이는 인간 사회의 온실가스 배출 탓이 아니라 '자연적 요인' 때문이라는 입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또한 기후 변화는 과거에도 자주 있었으니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정반대 진실을 외치는데도 이렇게 떠들려면, 과학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실제로 신흥 극우 세력들은 '좌파의 온상'인 사회과학계를 적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역시 현대 사회의 병폐쯤으로 내몰았다. 이런 반계몽주의적 태도는 결국 극우파의 치명적 약점이 됐다. 집권에 성공한 극우 세력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허둥대며 헛소리만 늘어놓다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한데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게 이들이 특별히 무지몽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기만 했다면 그토록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이 화석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야만 부와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집단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화석 연료, 즉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를 뽑아내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화석 자본이 있다.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의 신간은 이러한 연관관계를 깊이 파헤친다. 이 책은 미국과 브라질, 유럽 여러 나라의 신흥 극우파가 자국의 석탄-석유업계나 이와 직결된 제조업체들의 이익을 국민 혹은 민족의 운명과 일치시키며 기후 변화에 맞서는 양상을 분석한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이런 극우 포퓰리스트의 행태에 '화석 파시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하더라도 보통 '포스트 파시즘' 정도로 칭하는 데 비하면 상당히 과감한 진단이다.

정말 '파시즘'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와 기후 위기가 직결돼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기상 나팔소리와도 같다. 진지한 좌파 분석가들조차 대다수가 극우 포퓰리즘 열풍과 기후 위기를 서로 연관된 현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대공황과 나치의 관계처럼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만성적 침체가 극우 포퓰리즘의 배경이라고 생각했을 뿐, 자본주의의 최종-최대 위기인 기후 위기까지 시야에 넣지는 못했다.

그러나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는 이미 정치 무대의 중심에서 기후 위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이러한 틀로 바라보면, 더욱 명확히 이해되는 대목들이 있다. 가령 신흥 극우파가 왜 배외주의, 인종주의 같은 낡은 카드를 다시 내밀고, 또 그런 카드가 상당수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지가 드러난다.

기후 위기를 가속화하면서까지 화석 자본주의를 끈질기게 지속시키려는 중심부 국가들 내부의 노력은 기후 위기에 가장 취약한 지역들에서 이미 대혼란의 제1막을 열고 있다. 적도에 가까운 지역에 자리한 국가들에서는 2010년대 초에 벌써 농업-식량 위기가 닥쳐 생존을 위해 북상하는 난민들이 발생했다. 흔히 기후 위기와 연관돼 머리에 떠오르는지는 않지만, 식품 가격 인상이 촉발한 '아랍의 봄' 이후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 대륙을 찾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며,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미국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중미인들이 그들이다.

화석 파시즘 세력은 한편으로 국내 정책을 통해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위기의 직접적 결과인 기후 난민에 대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쌓는 것으로 대응한다. '검은 연료'를 지키기 위해 '흰 피부'만을 보호하는 장벽을 쌓자는 외침 ― 여기에서 '검은 땅'(나치가 독일제국의 생존기반이라 선포한 동유럽 곡창지역)과 '흰 피부'라는 고전적 파시즘 수사의 환생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복잡하다. 장벽 쌓기가 단지 극우 포퓰리즘 물결만 진정시키면 사라질 선택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의 저작도 간단하게나마 이 점을 불길한 어조로 언급한다. 기후 위기와 연관된 파시즘 위험의 제1단계는 '화석 파시즘'이다. 그러나 화석 파시즘의 완강한 활약 탓에 기후 위기를 최대한 완화하려는 노력이 처절한 실패로 끝난다면, 그 다음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제2단계가 열리게 된다. '생태 파시즘' 단계다.

기후 위기 '완화'에 실패할 경우에 인류는 이제 기후 급변에 '적응'해야 한다. 현 수준을 넘어선 기후 급변이 어떤 양상을 띨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만, 이미 드러난 두 가지 재난이 증폭돼 나타나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농업 위기에 따른 심각한 식량난과, 남반구 국가들의 붕괴에 따른 대규모 기후 난민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극우파뿐만 아니라 주류 정치세력도, 심지어는 그간 '녹색'을 자주 이야기해온 상당수 세력까지도 한 가지 처방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 유일한 처방이란 장벽 쌓기다. 즉, 식량난과 난민 이동이라는 위협에 맞서 전쟁 국가의 태세를 갖추고 그에 맞게 국내에서는 일상적 비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뒤늦게 에너지 체제 전환 같은 조치를 취하더라도 순전히 국가의 폭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민주주의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이 후퇴할 것이다. 때맞춘 생태 전환의 실패는 이렇게 전반적 파시즘화, '생태 파시즘' 시대를 열고 말 것이다.

현실은 이미 '파시즘 대 생태 전환'의 싸움

기후 위기의 실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기후 위기가 참으로 심각하며, 이것이 인간 사회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 급변의 극적 양상에 걸맞는 극적인 생태 전환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과 대비하면, 이런 현실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널리 퍼진 다음 같은 판단과 심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후 위기는 지구와 운석의 대충돌처럼 어차피 누구나 다 맞이할 종말이다. 그런 종말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뒤로 돌리기 쉽지 않을 바에는 지금의 정치 경제 체제에서 '살던 대로 살다' '함께 가는' 게 낫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살던 대로 살다' '함께 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의 가속화는 필연적으로 생태 파시즘 시대를 열게 돼 있다. 이 21세기 파시즘 체제에서 우리는 '살던 대로 살' 수 없을 뿐더러 '함께 가'지도 않을 것이다. 화석 파시스트들은 이 미래를 예고하는 선구자들이다.

이렇게 봤을 때, 생태 전환은 결코 먼 미래의 불확실한 가능성을 과장하며 호들갑을 떠는 일일 수 없다. 오늘의 생태 전환에 실패하고 내일의 전환에 또 실패할수록 10년 뒤의 파시즘은 기정사실이 된다. 생태 전환의 노력은 지금의 화석 자본주의 체제와 싸울뿐더러 이 싸움을 통해 미래의 파시즘과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오늘날 '가장 급한' 싸움이다.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에 '세대' 담론이 범람하고 있다. 이대남, 이대녀, MZ세대, 에코세대 ... 하나같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를 모르면 언론 기사도 이해하기 힘들고, 사석에서 정치, 경제를 논할 수도 없다. 여기에다 이미 익숙해진 말들, 가령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86세대, X세대 등을 합치면, 그게 곧 한국 사회의 지도라도 되는 것 같다.

주로 세대로 나누기는 하지만, 결국 다 '부족'명이다. 한국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는 결코 공유할 수 없다고 '가정되는' 특성으로 집단을 나누고, 한국 사회가 마치 그런 집단들의 무더기인 양 여기는 것이다. 즉, 2021년의 한국 사회란 이대남, 이대녀부터 86세대, 산업화세대에 이르는 수많은 부족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부족의 심성과 계산법, 언어와 몽상에 괴로워하며 모두 다 '헬!'을 외치는 난장판이다.

여기에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런 부족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를 느끼고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들이미는 묘한 단어가 하나 있기는 하다. 국적 불명의 'K-' 접두어가 그것인데, 어느덧 이 말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이나 '국민'의 기이한 대체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는 더 그럴 듯한 보편어들이 있었다. 근대의 거대한 이념들이 예외 없이 주창한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직접 연상시키는 언어들, 가령 '시민', '민중', '노동자'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부족명이 발명되는 세상에서 이런 이름들은 죽은 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예컨대 86세대가 '시민'을 말하면, 이는 꼰대의 위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또한 이대남을 '노동자'의 틀로 바라보려 하면, 이는 세월이 바뀐 줄 모르는 낡은 이념의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세태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목을 당당히 달고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젊은 저자 강남규의 칼럼 모음 <지금은 없는 시민>(한겨레출판, 2021)이다. 비록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지금은'이라는 또 다른 한정을 통해 이 책은 감히 '시민'을 호명한다. 지금은 없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민'을 부른다. 부족연합의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이 그것뿐이라 진단하는 정치권과 언론계에 던지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제목이다.

'깨시민'의 시대에 부재한 '시민'

시민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바야흐로 '깨시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전성기가 아닌가. 이 호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 정권까지 출범시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시민'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보편어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보편어를 무기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 무기를 빼앗겼고, 그런 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문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 강남규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문재인 정부 탄생 이후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지지자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즉 시민으로서 사회적 문제에 관여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대신, 지지자로서 문재인 정부에 정치적 당위를 위탁하고 정부를 엄호하는 데 주력했다. 이런 흐름은 여당이 제21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뒤에 심화됐다. "시민의 승리"로 탄생했다는 정부에서 역설적으로 "시민의 후퇴"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시민의 자리'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없는 시민> 10쪽)

그럼 강남규에게 '깨시민'과는 다른, 진정으로 깨어난 '시민'이란 누구인가? 이를 밝히기 위해 그는 "서문"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이라는 비유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시스템주의자'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다. 반면에 '의인'이란 문제 상황에서 이에 대처하려고 앞서서 행동하는 이들이다. 저자는 이 두 부류 가운데에 문제를 실제로 풀어나가는 데 기여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 묻는다. 시스템주의자인가, 아니면 의인인가?

사실 좀 극단적인 이분법이고, 따라서 억지 질문일 수 있다. 저자 역시 시스템주의자를 비판하거나 의인을 영웅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서 구조와 제도의 커다란 변혁을 강조하는 저자는 전형적인 시스템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으로 책을 시작하는 것은 시스템주의 접근법을 보다 진지하게 취할수록 거기에 커다란 빈 자리가 있음이 선명히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 역시 사람의 일이라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우리의 정체와 퇴보는 바로 그 당연한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망가진 시스템을 청산하는 일도, 좋은 시스템을 세우는 일도 모두 사람의 일"(8쪽)이라면, 시스템주의 해법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우선은 이 일을 해낼 "사람"을 찾아나서야 한다. '의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남규는 이 '의인'이 특출한 소수의 영웅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더 많은 이들이 '의인'의 짐을 나눠 질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부족을 떠나 더 큰 '우리'로 거듭 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 말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어떤 공백의 영역에 시민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소수의 특별한 의인들에게만 맡겨놓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좋은 시스템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구조를 바꾸는 일에 함께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함께 책임을 나누고, 부담을 덜고, 옳음을 따르는 마음을 모아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 '시민이 한 사회의 주인'인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다. 자신의 집을 일부러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처럼, 우리가 '사회'라는 집의 주인이라면 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서로 돕고 연대하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시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의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당위적 책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입법자와 통치자를 선출하는 일이나 다수결 논리로만 오해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함으로써 그 의미를 복원하고 확장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9-10쪽)

요컨대 강남규에게 '시민'이란 '책임'이라는 느낌과 의식, 상상력을 동반하는 호명이다. 서로를 '시민'이라 부르며 우리는 상대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나 또한 그 책임의 그물 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성가신 요청이며,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의 '깨시민'들은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에 대해 깨어있기를 거부하지 않는 '시민'이 돌아오지 않고서는 제도나 구조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변화해야 할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지금은 없는 시민>의 여러 글들에서 저자가 끊임없이 동료 시민의 관심과 결단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흔히 보는 칼럼집만은 아니다. 정말로 절실히 변화를 바라는 이의 격문이다.

모두가 '시민'이 되는 꿈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

"시인 김시종이 5.18을 마주하고 쓴 <명복을 빌지 말라>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날이 지나도 꽃만 놓여 있다면, 애도는 이제 그저 꽃일 뿐이다." 그렇다면 꽃조차 놓이지 않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145쪽)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가장 가슴을 때리는 대목이다. 2020년 4월 29일 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뒤에 쓴 칼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죽음"의 마지막 단락이다. <지금은 없는 시민>이 처음 세상에 나올 무렵인 올해 4월 22일에는 또 한 명의 젊은 노동자 이선호 씨가 평택항에서 300kg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무섭게도, 위의 처절한 문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매일 반복되는 현실이다.

이선호 씨의 빈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신임 송영길 대표도 찾아왔다고 한다. 송영길 대표는 자신의 SNS에 "자본의 논리에 일용노동자들이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야만의 경제 사슬을 개선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답을 찾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답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정부, 여당은 이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라는 모범 답안을 누더기로 만들어 '무늬만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180석 획득의 대승을 거듭할 수 있고,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산업 재해로 쓰러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들이 등장인물로 식별되는 '이야기'란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가령 '공정'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나선, 대개 대졸자이고 관리직 업무를 맡는 공항 정규직 같은 이들 말이다. "'다른' 청년은 어디에나 있다"는 글에서 강남규는 많은 점에서 그들과 같지 않은 이들이 늘 '청년'의 범주 안에서 삭제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대졸자, 그것도 명문대 졸업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언론사 기자의 펜을 거치면서 어떤 이들이 '이름'을 얻고, 어떤 '이야기'만 살아남는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을 거의 필사적으로 부족들로 세분화하는 최근 언론의 유행도 마찬가지다. 정치인, 언론인들이 이러저런 부족 '이름'들을 떠벌릴수록 어떤 이들은 오히려 더욱 가려지고 망각된다. '공정'을 논하며 주로 대학 입시 경쟁과 대졸자 취업난을 이야기 할 때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다른' 청년"들(128-9쪽)이 있다. 정부, 여당을 변호하는 중산층 시위대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외칠 때에 진짜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 "미투 고발자들, 사회적 약자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61쪽)이 있다.

이들이 망각을 거부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없는 시민>에 따른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시민의 자리'를 묻는 이야기다.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의 이야기, 그래서 무관심이 더는 무죄와 동일시될 수 없도록 다그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강남규가 너무나 깔끔히 정리한, 다음과 같은 한국 사회의 축도를 개선하자는 '공정'론 말고 그것을 뒤엎어버리자는 '평등'의 이야기일 것이다.

"가진 자들은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계급의 입구를 좁히려 특혜와 편법을 동원하고, 덜 가진 자들은 좁혀진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교육 신화'와 '부동산 신화'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그보다도 덜 가진 자들은 이미 가진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여성과 비정규직과 장애인을 밀어낸다." (27쪽)

<지금은 없는 시민> 속 변화의 단서들

<지금은 없는 시민> 곳곳에는 그런 '이야기'의 단서가 있다. 어떻게 하면 제6공화국의 정치인, 언론인들이 단단히 구축해놓은 기존 이야기들에 균열을 내고 새 이야기들이 솟아나오게 할지에 대한 고민들이 모든 글을 관통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쓴 칼럼인 "왜 저들은 <기생충>을 두려워하지 않나"이다. 이 글은 내가 이제껏 본 이 영화의 감상평 중 단연 뛰어나다. <지금은 없는 시민>은 이 글 한 편 때문에라도 애써 찾아 읽을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글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저자 자신이 요약한 말이 "선을 넘는 진보정치" 아닌가 싶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바꾸자고 말하려면 결국 선을 넘는 수밖에 없다. 국민감정에 도전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고, 현실적인 불가능성에도 기꺼이 도전하며, 독단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시선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90쪽)

바꿔 말하면, "선을 넘지" 못하는 정치와 언론, 사회운동은 이제 퇴장해야 한다. 두 차례의 촛불 시위를 경험하며 성장한 90년대생 저자는 이들이 퇴장해도 전혀 아쉽거나 걱정할 게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새롭게 대열을 채울 이들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지금은 없는 시민>의 유일한 오류는 제목일 것이다. 그 시민은 지금 없지 않다. 부족으로 분류되길 거부하고 공통의 이름으로 외칠 태세를 갖춘 이들이 없지 않다. 지금은, 단지, 충분히 결집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거기에 담긴 고민과 희망에 공명함으로써 이 오류를 더욱 선명히 입증하길 바란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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