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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 이유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에 중독된 '코리안 드림'의 수인이었다
이제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50년까지 기후 급변의 주 원인인 탄소 배출을 제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에 대놓고 반대하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지중해의 산불, 동아시아의 호우, 가을이 사라진 한반도 날씨 등등을 보고도 위기를 부인하고 전환을 불온시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제2라운드가 시작됐다. 한편에는 경제의 양적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탈탄소 사회로 전환할 수 있다는 '녹색 성장'론이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여전히 성장에 더 강조점을 찍으며 위기의 책임자인 대기업을 전환의 주역으로 내세우는 우파적 버전도 있고(문재인 정부가 그 전형이다), 이들에 비해서는 전환 쪽에 더 강조점을 찍지만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일정한 양적 성장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좌파적 버전도 있다. 어쨌든 지금 기후 위기 대책의 주류는 이 흐름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탈성장'론이 있다. '탈성장'은 프랑스어 decroissance, 영어 degrowth의 번역어다. 탈성장론자들은 경제의 양적 성장을 지속하면서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는 녹색 성장 노선의 시도가 시시포스의 노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비록 전력 생산을 재생가능에너지 중심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 전력 사용량이 늘어나게 마련이고, 그럼 탄소 배출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기 쉽다.
사실 탈성장론의 녹색 성장 비판은 너무나 강력하고 탄탄하여 수긍하지 않기 힘들다. 그러나 논의가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냐"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마이너스 성장'을 연상시키는 '탈성장'이라는 번역어부터가 대중의 접근을 차단한다.
또한 탈성장론은 GDP 같은 수치에 집착하는 경제 성장 논리를 비판하자는 것인데, 이야기가 "탈성장하려면, 성장률 제로여야 하느냐, 아니면 마이너스 몇 % 성장(역성장)이어야 하느냐"로 흐르는 순간 탈성장론 자체가 숫자 물신주의의 일부인 양 희화화되고 만다. 녹색 성장론이 모순으로 가득 찬 만큼이나 탈성장론은 의심과 몰이해, 관성과 반발의 장벽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탈성장론의 한 뿌리 –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
나 자신 아직은 뭐가 답이라 장담하기 힘들다.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는 처지다. 열정적인 탈성장론자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 지구를 식히고 세계를 치유할 단 하나의 시스템 디자인>(산현재, 2021)을 우석영 작가와 함께 우리말로 옮겨 낸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다. 이 책을 옮기면서 비로소 나는 탈성장론자들이 비판 논리만이 아니라 나름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에 탈성장이 제창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더욱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나 2000년을 전후해 프랑스에서 탈성장론이 처음 체계적으로 발전할 무렵의 주된 고민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프랑스 탈성장론의 대표적 사상가로 평가받는 세르주 라투슈는 여러 저작에서 당시 고민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이름이 있다.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그리스에서 나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사상가다. 이미 몇 년 전에 나온, 요르고스 칼리스 등의 또 다른 책 <탈성장 개념어 사전>(강이현 옮김, 그물코, 2018)에서도 라투슈는 주로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을 돌아보며 탈성장론의 원점을 짚는다.
카스토리아디스는 본래 트로츠키주의자였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에서 공산당 노선과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정통 트로츠키주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사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탈자본주의 사회의 요체를 노동계급의 자율성에서 찾았다. 생산 현상에서부터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사회 전체가 이런 아래로부터의 결정들에 따라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준으로 보면, 현실사회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대안이라 할 수 없었다. 아니, 본질적인 면에서 자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서부터 카스토리아디스 사상의 모험이 시작된다.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겉보기에 서로 다른 대목도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점에서 일치했다. 둘은 동일한 사회적 상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 상상이란 인간과 자연을 합리적으로 지배하여 끝없는 진보를 이뤄낼 수 있다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신화였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이 살아 있는 사회라면, 이런 신화가 지배해선 안 된다. 해방된 사회라면, 사람들이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애당초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회는 단지 각자가 스스로 좋은 삶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에 가장 좋은 제도들을 갖추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모두 이런 상상력의 분출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기는커녕 하나의 신화로 상상계 전체를 식민화했다. 두 체제 다 진보의 신화로 상상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진보의 신화에 맞춰 좋은 삶을 상상하도록 강요했고, 이 상상계 안에서 얼마나 표준에 가까워졌는지에 따라 삶을 평가하게 만들었다. 단지 소련과 동유럽은 이를 더욱 세련된 게임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반면 자본주의는 중국까지 끌어들이며 지금껏 이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카스토리아디스 사상의 소개로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일면적이다. 그는 우리말로 아직 그 전모가 소개되지 못한 대작 <사회의 상상적 제도(The Imaginary Institution of Society, 1975)>에서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며 장대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사상 전반에 관한 본격적인 소개와 음미가 꼭 필요하지만, 이는 미래의 과제로 넘겨야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탈성장론의 출발점이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이 무르익을수록 그는 상상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성장 신화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20세기 말의 선구적인 생태주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라투슈 같은 이들은 이를 '상상계의 탈식민화' 과제라 불렀으며, 그들이 결국 합의한 더 짧은 표어가 다름 아닌 '탈성장'이다.
탈성장론의 여러 계보들 가운데 이 한 가닥을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탈성장론의 인상은 훨씬 더 다채로워진다. 탈성장론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좋은 삶'에 관해 우리 스스로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자문(自問)하자는 호소다. 이렇게 자문하면 누구나 마주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은 분명 아닌, 그리고 더 이상 의미를 찾기도 힘든 낯선 신앙이다. 도대체 왜 내가 여태껏 이 신앙에 맞춰 살아왔지? 카스토리아디스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더 이상 진보를 진짜로 믿지 않는다. 모두가 내년에 조금 더 가지고 싶어 하지만, 행복이 연간 3%의 소비 성장에 달려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의 상상계는 분명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서구에서 유일하게 유효한 상상계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곧 해상도가 높은 텔레비전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탈성장 개념어 사전> 216쪽에서 재인용)
"과거와 비할 수 없는 규모의 새로운 상상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것은 생산과 소비의 확장 외의 의미들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즉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삶의 다른 목표들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는 경제적 가치가 더 이상 중심에 (혹은 유일하게) 있지 않는 사회, 즉 경제를 궁극적 목표가 아닌, 단지 삶의 수단으로 되돌리는 사회, 다시 말해 계속해서 증가하는 소비를 향한 광란의 질주를 포기하는 사회를 바라야 한다. 이는 자연 환경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현대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더욱 필요하다." (위의 책, 214쪽에서 재인용)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 이유
흔히 중국을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혼종이라고 하지만, 이 방면에서 대한민국이야말로 성공적인 선구자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상상계의 식민화에 관한 한, 한국은 자본주의의 역량에 국가사회주의식 수단까지 더하여 세계사적 극한을 실험한 나라다. 단지 숱한 기업의 광고만 진보의 신화를 퍼뜨린 게 아니라, 지금도 40대 이상 시민의 뇌리에 강렬히 남아 있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노래 가사 등을 통해 국가까지 나서서 이 신화를 주입했다.
오늘날 '초가집 없애기'는 '대형 아파트 단지에 내 집 마련'으로 바뀌고 '마을길 넓히기'는 '차로를 꽉 채우는 자가용 승용차 대열'로 바뀌었지만, 이런 주문(呪文)들이 우리 삶의 등대이자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 점은 변함없다. 우리의 상상계는 여전히 강력히 식민화돼 있다. 5천만 명이 이 획일적 신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대란, 공정-능력주의 논란, 입시 교육 과열 같은 숱한 병목 현상과 좌절, 원한과 분노가 쌓인다. 그래도 우리의 상상은 이 밀실을 벗어날 줄 모른다.
한국 사회의 경로를 가장 급격하게 바꾸겠다고 장담한 세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좌파가 실패한 것은 개량주의에 빠져 혁명을 저버렸기 때문도 아니고 혁명의 미망에 사로잡혀 현실적 개혁을 등한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한국의 좌파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와 그 변주에서 사람들을 깨우지 못했다. 깨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단지 저 꿈의 실현 범위를 넓혀 달라고 청원했을 뿐이다. 좌파 역시 '코리안 드림'의 수인(囚人)이었다.
탈성장의 문제제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성장론이 요구하는 과제와 대면하고 나서야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진정한 변혁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말이다. 우리 시대의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