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기

문재인식 '뉴딜',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다르지 않다

[한국판 뉴딜, 문제점과 대안 모색 2] '뉴딜' 아닌 '올드딜' 평가받는 이유
  • 입력 2020.08.19 18:32      조회 919
  • 태그

  • 공유하기

왜 '한국판 뉴딜'에 대한 평가가 이리 혹독할까

지난 7월 14일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는 형식을 빌려서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으로 대전환'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안'으로 발표되었다.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 사이에 계획되어 2025년까지 국비만 114조 원이 투입되는 종합국가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기획된 국가적 거대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정부 발표가 있고 나서 연이어서 '구린 딜', '헌딜', '느린 딜'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토록 긍정적 평가가 인색한 것일까?

내용을 좀 간략히 재확인해 보자.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은 형식적으로는 '디지털 뉴딜', '그린뉴딜', 그리고 '안전망 강화'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디지털 뉴딜은 D.N.A 생태계 강화, 교육 인프라 디지털 전환, 비대면 산업육성, SOC 디지털화의 4대 과제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는 대체로 지금까지 해왔던 ICT 산업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코로나19 충격을 의식해서 '비대면'을 특별히 강조한 것 정도다.

기존 ICT 산업정책을 가속하겠다는 것이며 철저히 공급주의적 정책이라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문재인 정부 초기의 혁신경제-현재의 디지털 뉴딜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관되고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 뉴딜 또는 '대전환'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으며, 어떤 점에서는 디지털 뉴딜의 원조라고 할 김대중 정부의 'IT산업 정책'에도 미치지 못한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망의 건설, ICT 벤처 기업의 육성, 공공기관 정보화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대규모 IT산업 프로젝트를 통해서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전환을 이뤄낸 바가 있다.

그린뉴딜 쪽으로 가면 애초에 기획재정부 원안에 없었던 것인데 대통령의 지시로 급조해서 그런지 더욱 내용이 빈약하다. 예산도 73조 4000억으로서 최대라고 하지만, 사실 국비 기준으로 보면 42조 7000억으로 연간 10조도 되지 않는다. 주요 역점분야로 '도시, 공간, 생활 인프라의 녹색 전환', '저탄소, 분산형 에너지 확산', '녹색산업 혁신생태계 구축'을 잡고 있지만, 공공부문으로 지극히 제한된 '그린 리모델링' 정도를 추가한 것 외에는 대부분 기존 사업의 연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11년 전 이명박 정부가 추진했던 녹색성장 정책과 거의 차별성을 찾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판 뉴딜정책은 '국가적 뉴딜'사업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라서 개별적으로 세부항목을 하나씩 짚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의문시된다. 굳이 요약한다면 기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을 혼합한 정도에서 질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며, 그것도 공공이 책임을 진다기보다 '민간대기업 주도'를 지원하는 방식을 띠고 있으며, 전환적 내용보다는 기존정책들의 연속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뉴딜보다는 올드 딜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사실 '딜'이 이뤄진 적도 없다.

디지털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봐야 한다

한국판 뉴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디지털 뉴딜'을 조금 더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가 '혁신경제',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IT 기술혁신 숭배 편향을 보인 것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이런 경향은 이번 한국판 뉴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디지털 뉴딜로 9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면서, 그 대표사업으로 '데이터 댐'을 구축을 예시한 대목이다. 대체로 인공지능을 위한 학습데이터 구축 일거리를 가정한 것 같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공지능을 위한 학습데이터 만들기는 일명 유령 노동(Ghost Work)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불안정한 노동으로 악명 높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디지털 자본주의, 플랫폼 자본주의는 지극히 양면적이라는 사실이다. 일정하게 혁신적 측면이 없지 않으나 동시에 '독점화의 문제', '감시자본주의의 문제', '불안정 노동의 양산 문제'와 같은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점들을 양산 시키기도 한다. 디지털 패러다임의 전환은 한쪽에서 플랫폼 기업이라는 자본주의 신종 모델을 낳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불안정 노동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 디지털화라는 것은 절대로 미래 비전일 수 없다. 코로나19로 확인한 것이 플랫폼 자본주의에 내재된 이와 같은 양면성이었다.

현재 디지털 뉴딜에는 이와 같은 디지털 경제의 양면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이미 확인되었거나 앞으로 예고하고 있는 양면성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고 여기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전략이 부재하다면, 디지털 경제가 만들어내는 미래는 결코 희망적일 수 없다. 이에 대한 단초는 이미 '타다'나 '배민'을 둘러싼 갈등에서 확인한 바가 있다. 오히려 정부의 디지털 뉴딜은 노동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킬 개연성이 높으며, 그 결과 코로나19로 더욱 악화될 사회의 불평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심화시킬 개연성이 높다.

그린뉴딜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
 
그린뉴딜 분야로 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한국판 뉴딜에 포함된 그린뉴딜은 현재 글로벌 표준으로 논의되고 있는 2020년 버전의 그린뉴딜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오히려 이명박 정부 버전의 녹색성장에 가깝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목표의 부재, 또는 잘못된 목표의 설정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그린뉴딜의 지향은 단순하게 '탄소중립사회의 지향'으로 되어있고, 이를 위해 이전에 세워두었던 '2030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겠다고 재확인했다. 한마디로 기존 목표나 계획의 수정이 없다는 것이다. 뉴딜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2020년 버전 그린뉴딜 최소한의 전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구의 온도상승을 1.5도로 억제하기 위해 향후 10년 안에 탄소배출을 절반으로 줄이고, 이를 위해서 매년 평균 탄소배출을 –7% 이상씩 감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사회의 대규모 전환 없이 단순 활동축소로 매년 7% 이상 줄인다는 것은 매년 올해 코로나19 전염 확산으로 경제활동을 강제로 축소 당했던 충격을 10년 연속해서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린뉴딜은 이처럼 강제적인 축소 대신에 '탈'탄소산업과 생활로의 계획적 대전환을 통해 탄소배출도 줄이면서 우리의 삶도 지켜내자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 10년 목표와 이에 준거한 매년 목표가 명시되어야 지속가능성이 담보되고 그것이 그린뉴딜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2030년 대신에 2050년 탄소배출 순제로를 목표로 하면 안 되는가? 이 대목에 관해서는 유엔기후협약 사무총장이 되어 2015년 파리협약을 성사시킨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Christiana Figueres)의 대답을 경청해야 한다. 그는 "2030년까지 글로벌 탄소배출을 절반으로 줄이는 목표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절대적인 최소한이다. 왜냐하면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절반으로 줄이지 못하면, 2050년까지 탄소배출 순제로 목표는 거의 달성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나 여당은 여전히 기존의 2030년 목표, "2030년까지 BAU(Business as Usual) 대비 37% 감축"을 그대로 고수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 목표는 약 5억 3600만 톤의 배출로서, 절반 감축에 비해서 거의 2억 톤 정도가 더 많을 정도로 큰 규모다. 이번 그린뉴딜 정책에서도 이 목표를 고수하겠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탄소배출 절반 감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재생에너지 비중은 여전히 2030년 20% 목표를 변경하지도, 탄소배출에 가장 책임이 큰 석탄화력발전을 2030년에도 36% 유지하는 목표를 변경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용어들도 10여 년 전의 개념들 탈탄소가 아닌 '저탄소', '친환경 산업' 등의 개념을 그대로 재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린뉴딜은 한국 정부가 임의로 마구 사용할 수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후 위기에 관한 유엔의 합의 수준(1.5도 이내 억제)을 준수하고, 이를 위해 대체로 '10년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그린뉴딜은 매우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수식어로 정말 '한국식 그린뉴딜 버전'을 창조하고 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진정한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전염병을 예고편으로 이후 더 파괴적으로 닥칠지 모를 기후 위기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후비상사태선언'은 그저 의례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루스벨트 뉴딜과 2020년 뉴딜은 다르다

'한국판 뉴딜'을 평가하는 기준점으로 곧잘 1933년부터 추진된 미국의 루스벨트 뉴딜이 호명된다. 정부의 문서조차 루스벨트 뉴딜의 구호였던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뉴딜은 루스벨트 뉴딜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루스벨트 뉴딜이 당시 막 부상하는 GM과 같은 대공장들의 시대에 가장의 안정된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안전망이 설계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최저임금제도와 8시간 노동제도, 실업보험과 산재보험, 연금제도 등이 모두 이런 취지에서 설계되었고 이것이 20세기 중 후반 미국의 완전고용 기반 사회안전망 체제의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기존 거대기업들이 슬림화되고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되면서 불안정 노동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를 가속화시키는 '디지털 뉴딜'을 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또한 루스벨트 뉴딜 당시에는 흑인과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이미 1인 가구가 다수가 되고 있으며 젠더 이슈를 포함한 소수자 차별 등의 이슈가 중대한 사회적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2020년대 뉴딜이 직면한 이런 과제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면했던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루스벨트 뉴딜은 부양자의 안정적 소득 아래 기업과 국가의 사회복지를 만드는 뉴딜일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화를 가속시키는 뉴딜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뉴딜은 평생직장을 기반으로 하는 복지가 무너지는 토대 위에서 해야 할 뉴딜일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를 버리는 뉴딜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 임의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뉴딜'을 조합하고 있지만, 사실 '그린뉴딜'은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이전인 2018년부터 이미 글로벌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이 시간표를 당긴 것뿐이고, 더욱 강력한 사회안전망과 일자리가 더 필요해졌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 그린뉴딜의 원칙과 비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2020년대 필요한 뉴딜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미국 오카시오 코르테스 의원이 2019년 2월 '그린뉴딜 결의안'을 내도록 지원했던 기후운동단체 선라이즈 운동(Sunrise Movement)이 정의한 그린뉴딜은 이런 취지에서 생각해볼 만하다. "그린뉴딜은, 2030년까지 100% 청정 그린 에너지를 달성하고, 필요로 하는 모두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해주며, 노동자와 일선 공동체들에게 정의로운 전환을 해주기 위해, 미국 사회의 각계각층을 참여시키는 10년 계획이다."

한국판 뉴딜 계획은 5년 계획이다. 최근 들어서 재정계획까지 구체적으로 담긴 중기 국가 프로젝트는 없었다. 그만큼 한국판 뉴딜정책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미칠 영향은 지대할 것이고, 향후 우리 사회의 방향과 성격을 크게 좌우할 것이다. 9월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부터 국회 공간에서부터 충분한 검토와 의견수렴이 있었으면 한다. 더불어 노동계나 시민사회, 특히 지역사회와 다면적인 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 접점을 찾고 사회적 합의와 양보를 하는 과정을 수반해야 한다. 그것이 딜(Deal) 아닌가? 7월 14일 정부의 발표는 문자 그대로 정부가 야당과 국민에게 내놓은 정부의 안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 이글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