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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경제] 디지털 자본주의가 배신한 개인화 시대

디지털 개인화 시대, 정말 개인은 존중받고 있나?
  • 입력 2021.05.04 09:00      조회 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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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와 정치#플랫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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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인용문은 하버드대학 종신교수인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최근에 저술한 대작 <감시자본주의 시대>에서 따온 것입니다.
 

21세기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개인’의 시대가 아닐까 싶다. 최근 여기저기서 격렬하게 세대간 논쟁이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도 ‘개인’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한쪽에서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의무에 관한 서사가 강조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개인을 억압하는 기존의 제도와 관습에 대한 강한 반발을 도처에서 목격하게 된다.

특히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개인에 대한 강조가 전례 없이 확산되고 있다. 각자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제한 없이 세상의 모든 다른 개인들과 접속하고, 세상의 모든 정보에 접근하며,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삶에 대한 서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현대의 디지털 경제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대중사회와 공동체 안에 갇힌 개인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는 200년도 훨씬 넘는 근대사회의 도래와 함께 이미 강조된 것 아닌가? 지금 새삼스럽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이 주제를 파고들기 위해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보자.

흔히 시민혁명 이전의 전근대사회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어느 곳에 태어났든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혈통이나 지역, 친족 등에 규정되어, 내 나라의 국민, 내 조상들의 후손, 내 어머니의 딸, 농사꾼의 아들로 정해진 운명을 걷는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일생을 농사꾼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고 다른 길은 없었다. 여기에 혈연이나 신분의 끈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나’라는 개념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유럽에서부터 시민혁명 등을 계기로 근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규범이나 의미, 규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삶이 ‘개인화’되기” 시작했단다. 그것은 “삶이 정해져 있는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열린 결말’을 갖는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모든 신분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시민들이 단번에 개인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사회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오직 무리로서의 대중, 생산 대중이나 소비자 대중으로서 인정받는 사회로 들어간 것이다. 그 정점에 20세기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가 있었다.

이 시기에 근대 사회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개인보다 ‘사회’를 특히 강조했던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개인이 과거의 속박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역작 <사회적 분업론>에서 잘 요약한다. 뒤르켐은 전근대사회의 핵심이었던 씨족, 친족, 공동체의 규칙과 의례로 묶인 ‘기계적 연대’의 사회가 끝나고 활발하게 개인들이 저마다의 사회적 분업에 참여하는 변화를 읽어냈다. 그리고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지향을 추구하면서도 사회 전체로 보면 각각이 필요한 ‘분업’을 이뤄서 서로 ‘유기적 연대’를 이루는 사회가 20세기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대중사회의 새로운 세계질서와 집중, 중앙집권, 표준화, 관리로 이루어지는 관료적 논리는 여전히 각자의 삶에 단단한 닻과 지침, 목표를 부여했다.” “세상은 그들에게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을 할 것을 기대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일은 아주 조금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대중사회에서 개인은 여전히 여러 제약의 굴레에 갇혀 있어야 했다. 특히 여성과 흑인, 소수자들에게는 더욱 더.

때문에 개인들은 “주어진 사회적 역할의 가장자리로 비어져 나오는 자아의식을 억눌러야 했고, 이를 위해 정신적인 고통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사회화와 적응은 핵가족을 대중사회의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도록 ‘인격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보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소재였다. 그 공장은 여성성이라는 신화, 벽장 속의 동성애, 교회에 다니는 무신론자, 불법 낙태 등 많은 고통도 생산했다.”

진정한 개인의 시대를 배신한 신자유주의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개인화는 처음으로 대중사회의 벽을 뚫고 진정한 ‘개인들의 사회’를 열 준비를 시작했다. 대중사회 안의 ‘우리를 묶고 있던 제약의 줄마저 끊고’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나갈 채비를 하게 된 것이다.

특히, 20세기 대중사회가 조성한 교육과 지적 노동은 우리가 개인적 의미를 창출하고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수 있는 도구인 언어와 사고력을 증진시켰다. 커뮤니케이션, 정보, 소비, 여행은 개인의 자의식과 상상력을 자극해, 이미 정해져 있는 역할이나 집단 정체성에 의해 억눌리지 않는 관점과 가치, 태도를 갖게 해준 것이다.

이제 개인들은 이제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사회적 제약보다는 자기의 선택을 더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길을 떠날 때 그 길에는 답도 없었고 따라갈 앞사람도 없었고, 나침반도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안의 가치와 꿈뿐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길은 나와 같은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엮어낼 수 있는지를 배운다.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족, 종교,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 도덕, 결혼, 공동체, 사랑, 자연, 사회적 관계, 정치참여, 직업, 음식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조건 하에서만 검토되고 재협상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제 자아가 우리가 가진 전부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의 삶이 꽃필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개인을 둘러싼 사회는 ‘신자유주의’라는 엄청난 체제변환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개인의 삶이 꽃피도록 환경을 마련해주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삶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개인의 삶을 위한 자원을 ‘승자독식’ 경쟁을 통해 서로 빼앗도록 하여 결국은 최종승자만 개인화될 기회를 주는 사회로 변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화된 삶이 아니라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번성하게 된다. “각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원자화되고 고립된,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개인에게 떠넘기고, 개인을 관계와 커뮤니티, 그리고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각자도생하는 이기적 사회” 말이다. 이렇게 개인에게 열린 삶은 해방적 잠재력을 실현하기는커녕 대다수 개인들에게 평생 불확실성, 불안, 스트레스의 함정으로 밀어넣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통제권을 우리가 행사하기를 원하지만, 어디에나 그 통제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개인화는 우리가 제각기 유능한 삶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찾아 해매게 했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보는 경제, 정치와 전투를 벌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 고유의 가치를 지닌다고 알고 있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된다.”

디지털 자본주의가 개인을 위한 미래를 약속할까?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배신한 개인화를 향한 열망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애플의 아이팟과 아이폰, 구글의 검색엔진, 페이스북의 광대한 소셜네트워크, 아마존의 맞춤형 쇼핑, 넷플릭스의 개인에게 최적화된 영화 추천 등이 드디어 개인을 위한 독립적 삶을 실현해주는 것 같았다. 20세기 포드 자동차가 대량소비사회를 열었던 것처럼, 특히 애플은 21세기 벽두부터 “개인이 집단에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 개인화된 소비에 대한 그들의 수요를 타진함으로써 폭발적인 상업적인 성공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들 혁신적인 플랫폼 기업들이 “우리의 새로운 요구와 가치를 지지하는 암묵적 약속은, 우리 내면의 존엄성과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우리 개개인을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개인적 요구에 무관심한 제도적 세계로부터 잠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가운데, 내가 선택한 바로 그 방식으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믿음이 싹트게 된다.

“디지털 자본주의가 개인의 권익을 지지해주리라는 기대는 21세기 첫 1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나 사람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찾게 해줌으로써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새로운 영역에서 삶을 바꾸어줄 것만 같았다.”

개인들이 각자의 독립과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섰을 때,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각 개인도 검색엔진으로 세계의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구를 주었고, 마음만 먹으면 1인 방송으로 세계의 사람과 만날 유투브 채널을 주었으며, 집에서 혼자 페이스북을 통해 온갖 인간관계를 수평적이고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 “디지털 시대는 결국 소비의 초점을 대중에게서 개인으로 옮기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21세기는 수십억 명의 새로운 인류를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한때는 영원할 것 같았던 조건으로부터, 그리고 대중사회라는 환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엄성과 유능한 삶을 살 기회를 가져야 마땅한 존재임을 안다. 일단 나온 후에는 다시 튜브에 넣을 수 없는 치약처럼, 한 번의 해방된 우리의 자아는 다시 가둘 수 없다.”

개인화되려는 우리의 욕구를 악용해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의 핏빛 전투장으로 만들었던 신자유주의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서, 이제 드디어 개인의 해방을 만끽하게 해 줄 디지털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인가? 하지만 이 분야의 권위자인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최근에 저술한 대작 <감시자본주의 시대>를 통해서 이 역시 착각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처음에는 “사용자가 프라이버시라는 값을 지불함으로써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정보, 접속, 그밖의 디지털 상품 등 풍성한 보상을 얻게 된다고” 그들은 유혹했다. 이 새로운 체제에서 우리 각자의 요구가 충족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에게 데이터로 추출되고 재조직되어 광고회사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보프는 이런 현상을 ‘감시자본주의’라고 종합했는데, 여기의 플랫폼 기업들을 ‘디지털 트럭’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21세기의 개인들은 “디지털 트럭 짐칸에서 던져진 쌀과 분유 포대에 도취되어 운전을 누가 하고 어디로 가는 트럭인지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원이 필요했고, 심지어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절히 기다렸던 트럭은 자동화된 침략, 정복 운송 장치에 가까워서 적십자보다는 매드맥스, 유람선보다는 해적선을 닮았다.”

그러면 디지털 자본주의가 약속했던 개인의 삶 역시 신자유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배신당할 운명의 약속이라면 우리 개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21세기를 진정 개인의 자율적인 삶과 열린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까? 주보프는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우리 개개인은 수많은 정보생산 주체이면서도 그 정보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사용에 대한 의사결정권도 없고, 거꾸로 사적 기업들의 마케팅 수단화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자각과 이를 바꾸기 위한 긴 투쟁이 필요하다고 요청한다.

“디지털 미래가 우리가 살 집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주체는 우리이어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우리가 결정해야 하며, 누가 결정할 것인지를 우리가 정해야 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이다.”

* 이 글은 '레디앙'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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