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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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노트>여덟번째: 피케티의 미래비전 =참여사회주의(분권형 사회주의)
요즘 세상에, 주류 사회과학자가 미래사회를 제안하면서, '사회주의'라는 이름표를 붙이기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최근 스티글리츠는 '진보적 자본주의'라고 자신의 대안사회 이름을 붙이기도 했던걸 보면...)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때는 이미 소비에트가 무너져서, 20세기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따위는 없다고 자신하는 1971년생 피케티에게는, 자신이 선택할 미래사회에 사회주의 배너를 붙이는 것이 크게 거칠것이 없나 보다.
암튼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도 피케티는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그의 질문은 간단한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소유권에 대한 도전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뤄질 수 있단 말인가? 소유권의 대안을 찾으려다 보니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피하기 어려웠나 보다.
(1)
당근, 그의 사회주의는 20세기 국가사회주의전통 보다는 스스로 가장 성공한 모델이라는 북유럽 사민주의에서 시작한다. 그는 기존 국가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고민없이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상 어느 이데올로기든 - 하나는 사적 소유를 다른 하나는 국가소유를 신성화한다-신성화와, 공백에 대한 공포의 제물이다."
그는 특히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유일한 해법으로서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믿음은 기업 내의 의결권 배분과 권력 분유문제와 마찬가지로, 세금과 세율과 과세 대상 문제를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도록 막곤했다"면서, 기존 사적 재산권을 오직 '국가'로 옮겨놓는데 집착했던 점을 문제시한다.
또한 사민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민주의는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소유의 조건을 다시 사유하지 못한 한계, 고등교육에서의 불평등주의적 도전에 대처하지 못한 한계, 재분배 문제를 초민족적 규모로 확장하지 못한 한계"라고 하는 세 가지 한계의 벽을 깨지 못하고, 지난 수십년동안 신자유주의 침식에 밀렸다고 진단한다.
(2)
그러면 피케티의 대안은? 그는 "한 사회와 이 사회 내부의 권력관계 및 소유관계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의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나 있으며, 이러한 차이들이 세부적인 것에만 관련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진단하면서, 사회적 소유와 일시소유를 결합한 참여적 사회주의 전망하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은 이후 별도로 노트해 보려한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더. 그는 참여사회주의 전망을 하면서 이야기의 시작을 '정의론'으로 꺼내는데,
"정의는 항상 무엇보다도 진행중인 집단적 숙의의 결과로 구상되어야 한다"는 전제아래, 무한숙의(endless deliberation)라는 사고실험을 할 경우 도출되는 결론으로 정의론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매우 추상적이어서 어떤의미에서는 사고실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 )
그렇지만 그의 정의론에 거창한것은 하나도 없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롤스의 정의론을 간략하게 그의 방식으로 빌려다 쓰는것 같다. 예를 들어서 그의 정의론은 "정의로운 사회란 사회구성원 전체가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기본재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다."
모두에게 기본재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가난한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가장 높은 생활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관계, 소유관계, 소득 및 자산분배를 조직한다"는 것인데, 모든 차별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다.
다만 그는 롤스의 정의론이 가진 추성성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특히 차등의 원칙을 주장했다면, 당연히 강력한 소득 재분배를 위해 차등적으로 세율을 정하는 '누진세'를 제대로 주장하지 않은 점을 문제시 한다. 아무튼 그에게는 불평등 해소를 위한 미래전망제시 대목에서 이 이상 복잡하게 정의론을 구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하다.(이 대목 분량이 불과 몇장 되지 않아 이 이상 노트하는 것은 오버일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때는 이미 소비에트가 무너져서, 20세기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따위는 없다고 자신하는 1971년생 피케티에게는, 자신이 선택할 미래사회에 사회주의 배너를 붙이는 것이 크게 거칠것이 없나 보다.
암튼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도 피케티는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그의 질문은 간단한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소유권에 대한 도전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뤄질 수 있단 말인가? 소유권의 대안을 찾으려다 보니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피하기 어려웠나 보다.
(1)
당근, 그의 사회주의는 20세기 국가사회주의전통 보다는 스스로 가장 성공한 모델이라는 북유럽 사민주의에서 시작한다. 그는 기존 국가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고민없이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상 어느 이데올로기든 - 하나는 사적 소유를 다른 하나는 국가소유를 신성화한다-신성화와, 공백에 대한 공포의 제물이다."
그는 특히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유일한 해법으로서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믿음은 기업 내의 의결권 배분과 권력 분유문제와 마찬가지로, 세금과 세율과 과세 대상 문제를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도록 막곤했다"면서, 기존 사적 재산권을 오직 '국가'로 옮겨놓는데 집착했던 점을 문제시한다.
또한 사민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민주의는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소유의 조건을 다시 사유하지 못한 한계, 고등교육에서의 불평등주의적 도전에 대처하지 못한 한계, 재분배 문제를 초민족적 규모로 확장하지 못한 한계"라고 하는 세 가지 한계의 벽을 깨지 못하고, 지난 수십년동안 신자유주의 침식에 밀렸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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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피케티의 대안은? 그는 "한 사회와 이 사회 내부의 권력관계 및 소유관계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의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나 있으며, 이러한 차이들이 세부적인 것에만 관련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진단하면서, 사회적 소유와 일시소유를 결합한 참여적 사회주의 전망하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은 이후 별도로 노트해 보려한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더. 그는 참여사회주의 전망을 하면서 이야기의 시작을 '정의론'으로 꺼내는데,
"정의는 항상 무엇보다도 진행중인 집단적 숙의의 결과로 구상되어야 한다"는 전제아래, 무한숙의(endless deliberation)라는 사고실험을 할 경우 도출되는 결론으로 정의론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매우 추상적이어서 어떤의미에서는 사고실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 )
그렇지만 그의 정의론에 거창한것은 하나도 없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롤스의 정의론을 간략하게 그의 방식으로 빌려다 쓰는것 같다. 예를 들어서 그의 정의론은 "정의로운 사회란 사회구성원 전체가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기본재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다."
모두에게 기본재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가난한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가장 높은 생활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관계, 소유관계, 소득 및 자산분배를 조직한다"는 것인데, 모든 차별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다.
다만 그는 롤스의 정의론이 가진 추성성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특히 차등의 원칙을 주장했다면, 당연히 강력한 소득 재분배를 위해 차등적으로 세율을 정하는 '누진세'를 제대로 주장하지 않은 점을 문제시 한다. 아무튼 그에게는 불평등 해소를 위한 미래전망제시 대목에서 이 이상 복잡하게 정의론을 구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하다.(이 대목 분량이 불과 몇장 되지 않아 이 이상 노트하는 것은 오버일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