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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손호철의 응시] ‘4·19탑’ 광화문에 새로 만들자

  • 입력 2021.04.13 11:00      조회 920
    • 손호철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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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E. H. 카의 유명한 역사론이다. 역사를 과거 ‘사실’의 누적으로만 보는 실증주의와 ‘사실’을 무시하고 현재의 시각만 강조하는 사관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말로 유명하다. 코로나19 때문에 외국을 가지 못하는 김에 한국현대사 답사를 하면서 이 말에 대해, 특히 ‘역사 기억하기’, 아니 ‘역사 만들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난’으로 취급받던 동학을 ‘혁명’으로 복권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다.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던 그는 집권초기 동학혁명기념탑을 건립했고 5·16이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유신 다음해에는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우금치에 위령탑을 세워주고 친필로 글씨까지 써줬다. 하지만 설립문에 유신이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써, 민주화 이후 민주인사들이 그 글씨를 파버렸다. 전두환도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농민군의 첫 승리지인 정읍 황토현에 전봉준 동상 등 동학혁명기념시설을 만들었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학을 이용한 것이다.

여권의 오만과 위선이 가져온 사필귀정의 참사 등 여러 현안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역사 만들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주가 4·19혁명 61주기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4·19를 짓밟은 5·16쿠데타세력이 만든 ‘거짓 4·19 기념사업’을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아래 생략).” 나 자신 대학시절 감옥도 가고 제적도 당한 학생운동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민주묘지는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묘역을 꼼꼼히 살피지는 않았다. 현대사 답사 때문에 꼼꼼히 살펴보다가 4·19기념탑 앞조각 뒤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묘지가 쿠데타 직후 군부가,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으로 극찬하고 4·19를 짓밟은 5·16쿠데타에 자금지원을 하고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무리 자신들과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이승만 유세를 다녔으며 이승만의 3·15부정선거 항의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어 터져 나온 4·11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치매가 아니라면, 자신이 ‘이적행위’라고 비판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어떻게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라는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놀라서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기념탑을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세우려는 것을 5·16 후 시위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로 ‘유배’를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친일·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4·19민주묘지는 이후 김영삼 정부가 민주성지로 재정비했지만, 이처럼 기본틀은 군사독재가 엉뚱한 곳에 친독재 문인과 친일·친독재 조각가를 동원해 만든 ‘가짜’다.

여러 논쟁 속에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파헤쳐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 묘역은 어쩔 수 없더라도, 기념탑은 수유리의 가짜 대신에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제대로 된 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헌법 전문에 나오는 역사적 항쟁의 기념탑을 중심가 현장이 아니라 엉뚱한 외곽에 세우는 나라는 없다. 아니면 광화문에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촛불항쟁을 포괄적으로 기념하는 ‘민주항쟁탑’을 만들어야 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름 없는 민초들의 민주항쟁도 중요하다. 새로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도 국민의힘의 ‘수구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라도 이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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