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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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21세기에 더욱 절실한 프루동의 메시지-상호주의와 연방주의
국회의원이 된 파리의 아나키스트, 21세기에 부활하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생활인이 마음 놓고 책을 읽기에는 오히려 여름 휴가철만한 때가 없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계절이 돌아왔으니, 이번 여름에는 어떤 책을 손에 들까 고민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이런 이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만한 신간이 때맞춰 나왔다. 조지 우드코크의 <프루동 평전>(하승우 옮김, 한티재, 2021)이다.
그림1. <프루동 평전> (출처 : 도서출판 한티재)
잘 쓰인 전기는 소설만큼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따라 역사나 사상, 문예 등에 관한 깊이 있는 정보나 사색까지 전해준다. 우드코크의 <프루동 평전>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그만 이틀만에 자투리 시간을 다 쏟아 부어 완독하고 말았다. 그만큼 흥미진진했다.
프루동이라고 하면, 보통 '아나키즘의 시조'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회과학 서적에 좀 더 관심 있는 이들은 K.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한물 간 사상가쯤으로 그려진 모습에 익숙할 테고,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젊은 독일 혁명가들 앞에서 젠 체하는 명망가로 그를 그려 이런 인상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당 선언> 이전에 사회주의-노동운동 세계에서 최대 베스트셀러였던 <소유란 무엇인가?>의 저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1809-1865)은 과연 역사책의 각주 정도로 기억돼도 좋을 인물인가? 사회주의운동의 첫 세대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자 출신이었던 그는 정말 후배 혁명가들에게 거드름이나 피우던 현학자일 뿐이었을까?
19세기 프랑스 사회주의의 최대 사상가이자 행동가, 프루동
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에 남은 프루동의 이미지가 진상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곤 했지만, <프루동 평전>은 이런 적대자들의 평가와 그의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더 거대함을 보여준다. <프루동 평전>은 19세기에 '사회주의운동의 수도'라 불렸던 파리를 중심으로 당대 혁명운동의 전모를 박진감 넘치게 그리는데, 프루동은 그 중요한 순간마다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는 뒤늦게 논평이나 쓰고 훈수만 늘어놓는 현학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투사였다.
일단 책 앞부분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대중교육도 발전하지 않은 시절에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으로 독창적 사상가로 성장하는 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이 노동자는 그 시절에 자수성가한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자기가 속한 계급을 부끄러워하거나 이와 단절하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통로를 여는 일과 일치시켰다. 지역 장학재단 격인 브장송 아카데미에 보낸 지원 신청서의 한 대목이 청년 프루동의 심정을 잘 드러낸다.
"노동계급으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여느 때처럼, 특히 이익과 희망을 나누면서 계속 노동계급에 속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선택을 받는다면, 지원자의 엄청난 기쁨은 사회에서 이로운 역할을 하길 바라는 여러분의 온당한 바람을 충족시키는 최초의 노동계급 대표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 겁니다. 또한 앞으로 쉬지 않고 철학과 과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모든 의지와 정신력을 다해, 내 형제들과 동료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프루동 평전> 94쪽)
실제로 프루동의 이후 삶은 "내 형제들과 동료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고투이자 모험이었다. 그의 출세작은 뭐니 뭐니 해도 1840년에 쓴 <소유란 무엇인가?>이고 마르크스를 비롯한 젊은 혁명가들이 주위에 모인 것도 이 저서 덕분이었지만, 이 책을 쓰기까지의 이야기는 <프루동 평전>의 1/5밖에 안 된다. 많은 이들이 이때까지의 프루동만 기억하지만, 그의 활약은 오히려 그 다음부터가 볼만했다.
압권은 1848년 2월 혁명과 이후 몇 년 동안이다. 이 시기는 프랑스 근대사뿐만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사회주의운동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결정적 순간이었다. 우리에게는 역시 마르크스의 몇몇 저작(<프랑스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주로 소개돼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프루동 평전>은 이에 관한 훌륭한 보충 자료다. 물론 프루동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배치하기는 하지만, 그간 잘 몰랐던 당시 혁명의 여러 진실을 전한다.
가령 2월 혁명 이후 소집된 제헌의회는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거대한 구상들이 의제에 오르고 서로 격돌한, 사상의 전장이었다. 6월 노동자 봉기의 폭력 진압 탓에 제헌의회의 정책 논쟁이 충분히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일자리보장제의 원시적 형태였던 루이 블랑의 국영 작업장과, 푸리에주의자 빅토르 콩시데랑이 내놓은 기본소득제의 선구적 형태가 부딪혔다. 이 의회에 프루동도 보궐선거를 통해 진출했고, 인민은행을 만들어 노동자 협동조합 창설을 지원하자는 또 다른 거창한 비전을 던졌다. 150여 년 뒤의 우리 시대와도 직결되는 거인들의 시간이었다.
제헌의원 프루동이라니, 이것도 그를 둘러싼 상투적 이해와는 잘 맞지 않는 사실이다. 프루동은 분명 아나키즘의 창시자이고, 노동 대중의 궁극 목표가 '아나키'라고 처음 주창한 인물이 맞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선거에 뛰어들고 당선돼 대의기구에 참여한 것이다. 단지 참여만 한 게 아니라 그런 기회를 얻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부르주아계급의 대표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제헌의회 석상에서 그가 소수의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혹은 그들조차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대의를 대변하는 장면은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나키스트' 프루동이 국가권력 문제를 놓고 원칙 없이 오락가락한 것인가? 당대에도 이미 그의 별명이 '역설의 인물'이었다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프루동 평전>에서 내가 느낀 바는 좀 다르다. 프루동은 구체적인 정세에 따라 직접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투표 보이콧 운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정권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아나키' 이상은 후대 아나키스트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덜 교조적이고 더 실천적이었다. 그에게 아나키즘은 교의라기보다는 현실 국가권력에 민중의 입장에서 대처하며 그때그때 다양한 색깔로 나타날 수 있는 실천 지침에 더 가까웠다.
확실히 <프루동 평전>이 전하는 이 혁명가의 삶과 사상은 책을 읽기 전에 어렴풋이 그리던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운동의 제단 한 가운데에 프루동의 신상을 다시 올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드코크의 <프루동 평전>도 그런 입장은 결코 아니다. 저자는 의식적으로 성인전과 거리를 둔다. 프루동의 한계와 오류, 모순을 빠짐없이 냉철하게 짚는다.
예를 들면, 프루동은 당대 기준으로 봐도 지나친 여성 혐오 선동가였다.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글귀 하나쯤 쉽게 찾을 수 있는 동시대 저자들과 같은 수준이 아니다. 그는 이 주제로 무려 논문 몇 편을 써낸 사람이다.
이게 사상가로서 치명적인 그늘이라면, 실천가로서 보인 결함도 확연했다. 그가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내리거나 적을 오판한 사례는 <프루동 평전>이 전하는 것만도 여럿이다. 그래서 말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독재 체제와 야합하려 했다는 오명까지 썼다. 그 시절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오귀스트 블랑키를 제외하면, 가장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실망스러운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의 삶이라는 교향곡의 종지부는 읽는 이의 심장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하다. 프루동이 병마와 싸우던 1860년대 중엽에 한 무리의 젊은 노동자들이 그를 찾았다. '60년대 선언'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제1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를 이끌게 되는 청년들이고, 1871년에 파리 코뮌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적 실험들을 펼치게 될 이들이었다.
죽음을 앞둔 프루동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이라는 최후의 저작을 써서 이들의 목소리에 화답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문헌이야말로 프루동 사상의 정수를 압축하고 있었다. 이 글의 정신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것으로 '잘못' 알려진 파리 코뮌 선언의 문장들을 통해 더욱 힘차게 울려 퍼졌다.
"코뮌의 절대적인 자치는 각 코뮌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이자 시민,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보장함으로써 프랑스의 모든 지방으로 확대된다. 코뮌의 자치권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다른 모든 코뮌들의 평등한 자치권에 의해서만 제한될 것이다... 즉 코뮌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해방을 보장해야 한다." (위의 책, 512쪽)
21세기에 더욱 절실한 프루동의 메시지 – 상호주의와 연방주의
프루동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유언처럼 남긴 메시지를 압축하면, 상호주의(mutualism)와 연방주의라 할 수 있다. '상호주의'는 우리에게는 낯선 단어이지만, 그 내용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상호주의란 노동자들이 상호부조를 통해 결성한 '연합'들(<프루동 평전>에는 '조합'이라 번역돼 있다)이 생산 활동을 담당하게 하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기업 대신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협동조합이 주된 생산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주의는 프루동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는 1840년대 초에 리옹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이를 배웠다. 프루동은 말년까지도 그들이 창안한 '상호주의'라는 이름을 고집하면서, 인민은행을 설립해 노동자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하자고 주창했다.
이 구상은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조소의 대상이 됐지만, 당대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에 더 참신한 대안인 것 같다. 실제로 좌파 입장에서 제출된 생태 전환 구상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책이 공공적 형태로 녹색투자은행을 설립해 지역 주민들이 결성한 재생가능에너지 협동조합들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프루동 제안의 현대적 응용이 아닌가.
연방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막강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번성하고 혁명-이후 체제들 또한 이에 버금가는 과잉 확장 국가로 이에 맞서던 시절에는 프루동의 연방주의처럼 세상모르는 이상주의도 달리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남긴 것이라고는 북반구의 남반구 수탈, 일국과 지구를 가로지르는 불평등, 기후 재앙 따위 밖에 없는 지금, 상황은 반전되고 있다. 민중 자치가 작동하는 지역 코뮌들로 이뤄진 연방이 기존의 관료주의적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아나키스트들만이 아니라 급진민주주의자,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새롭게 각성한 사회주의자의 비전들이 수렴하는 지점이 되고 있다.
상호주의와 연방주의의 이러한 뜻밖의 회귀를 통해 우리는 생태적 전환이 요즘 기후 재앙 탓에 갑자기 닥친 요구가 아니라 인류의 오래 된 염원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여름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프루동과 조우해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