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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손호철 칼럼] 민심과 역사

  • 입력 2022.07.12 15:06      조회 796
    • 손호철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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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권이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가 있다. 대통령이 여론을 무시하고 ‘역사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여론에 연연하지 않으며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소명주의’에 빠지면 자기정정의 기회가 사라진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3김 이후 대통령들은 지지율이 떨어지면 모두 그랬던 것 같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때는 청와대 홍보수석이 대통령은 21세기인데 국민은 독재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며 ‘낙후한 국민’을 탓하기도 했다.

물론 여론만 따라가고 지지율에 연연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잘못된 인기정책을 추구하는 ‘나쁜 의미의 포퓰리즘’은 문제가 많다. 안철수 의원이 2012년 처음 정치에 나서며 국민들의 정치혐오 정서에 편승해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이겠다고 한 것이 대표적 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정권 초기 국민연금을 ‘더 많이 내고, 더 많이 받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많았지만, 더 내라고 하면 여론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논의를 끌고 가지 않았다. 최근 밝혀졌듯이, 문재인 정부가 인기만 생각해 한전이 요구한 전기요금 인상을 계속 거부해 전기료 폭탄을 다음 정권에 미룬 것 역시 잘못이다.

이 같은 인기지상주의도 문제지만, “나는 역사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론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소명주의’는 이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 이 점에서 유례없이 정권 출범 두 달도 되지 않아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여간 위험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이어서 “제가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한 일이다.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 마음만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더욱 그러하다. 대통령은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윤 대통령의 ‘조야한 대통령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민만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유례없이 낮은 것은 국민이 낙후해서인가? 탄핵당한 박근혜, 윤 대통령이 시도 때도 없이 비판하는 문재인 정부는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고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나? 최악의 대통령은 국민만 생각하지 않고 사심이 있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대통령이 아니다. 오히려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며 국민을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이끌어가는 대통령이다.

탈권위주의 등 잘하는 것들도 있지만, 보수층까지도 지지를 철회하는 등 유례없이 지지율이 낮은 것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경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정정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맹신과 잘못된 소명의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문제가 많은 한심한 인사를 줄줄이 해 놓고도 비판적 민심에 대해 “전 정권 장관 중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화를 내니 할 말이 없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 같은 ‘독선적 리더십’과 ‘마이웨이’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의 경우 어려운 환경에서 역경을 딛고 성공한 자수성가형으로 여론에 반해서 소신껏 살아와 성공했다는 ‘성공신화’가 여론에 반하는 ‘잘못된 소명의식’의 근거가 됐다.

윤 대통령은 성장 과정은 힘들지 않았지만 이후 과정은 이들 못지않게 ‘자기확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시를 9수 만에 붙었고 박근혜 아래서 국정원 수사 중 원칙을 지키다가 귀양을 갔다. 촛불 덕분에 ‘법치의 상징’으로 검찰의 꽃인 검찰총장까지 올랐지만 조국사태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내야 했다. 이후 유례없이 정계 입문 9개월 만에 당내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에 따르면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지지율은 별로 유념치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는 “나는 여론이나 상황에 연연치 않고 내 원칙을 지키고 나가면 승리한다는 확신”을 그에게 심어줬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위험하고 국민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오만과 독선이다. 윤 대통령이 정치초년생으로 실수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자기성찰을 통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일이다. 전 정권에 대한 사정, 이재명 의원의 등판으로 여론이 반전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가장 위험한 대통령은 민심을 무시하면서도 국민을 위한다는 소명의식에 충만해 엉뚱한 방향으로 국민을 이끄는 대통령이다. 계속 지금같이 할 바엔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 2022년 7월 12일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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