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
[장석준 칼럼]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파업이 던지는 질문…'자본주의'와 '산업'은 같은가?
[장석준 칼럼] '자본주의'가 아닌 '산업'의 논리 대변하는 '산업노조'가 필요하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노사 간 합의로 일단 끝났다. 공권력 투입 같은 비극으로 치닫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노사 합의 내용은 애초에 노동자들이 바랐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친다. 그래서 극우 언론은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쳐놓고 얻은 게 고작 그거냐”며 조롱하기도 한다.
정말 잔혹하고 몰지각한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한당들의 논평과는 달리, 이번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파업은 한국 사회에 참으로 소중한 각성의 기회를 열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음들을 던졌다.
정규직보다 훨씬 더 많은 하청 노동자의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산업이 과연 더 버틸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업의 토대인 숙련 노동자층이 해체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십 년 간 지속돼온 한국 조선업의 다단계 하청 구조를 끝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신자유주의의 한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우리가 반드시 대면하고 답해야 할 물음들이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이렇게도 재정리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산업'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산업'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자본주의' 아닌 '산업'의 논리는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놓여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 그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며 옹호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19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독(도크) 화물창 바닥에 스스로 용접한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본주의는 '산업'이 아니라 '금융'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와 '산업'을 굳이 떼어놓으려 하다니, 말이 안 된다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생각 속에서 둘은 하나로 겹쳐져 있다. 산업자본주의의 시작을 애써 '자본주의혁명'이라 부르는 학자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산업혁명'이라 한다. 이게 상식이다. '산업', 즉 근대 공업을 시작한 것이 자본주의이니 둘은 같은 사물이자 현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산업의 투자와 운영은 주로 자본가들의 몫이므로, 이 상식에 의문을 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산업'은 같지 않다. 분명히 서로 다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이윤 획득과 자본 축적이지 산업 발전과 유지가 아니다. 산업 투자와 운영은 이윤을 얻고 자본을 불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본가들은 이윤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더 많은 경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산업에 투자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산업에는 이런 자본가들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목표와는 다른 다양한 기능들이 있다. 모든 산업은 사회의 필요들을 충족하는 활동이다.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소득과 안정, 보람을 얻을 일자리를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가 지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봉사를 수행한다. 특히 현대의 산업은 생산과 서비스에 기계를 투입하여 이런 기능을 전에 없이 거대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이런 기능들 역시 자본가들의 지휘 아래 이뤄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자본가들은 오로지 이윤 획득과 자본 축적에 기여할 경우에 한해 이들 임무를 떠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이윤을 얻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이런 기능들 가운데 무엇이든 쉽게 내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윤 확보를 위해 이런 기능 가운데 상당 부분에 대해 '태업'을 벌이기까지 한다. 독점기업의 일방적인 가격 인상이나 대량 해고가 바로 그런 사보타주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본성은 산업보다는 금융 쪽에 더 가깝다. 돈을 불리는 것이 유일 절대 목표이며, 사회의 다른 모든 활동을 이 한 가지 목표에 복속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착시가 생긴다. 돈을 불리는 효과적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생산, 서비스와 새로운 기계를 결합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는 늘 산업혁명과 함께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산업의 영원한 수호자는 아니다. 아니, 재무제표에 적히는 화폐 수익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는 오히려 주저 없이 산업을 희생시킨다. 금융이 산업을 압도한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일 따름이다.
이번 파업 와중에도 우리는 이러한 시각을 대변하는 글들을 온라인에서 숱하게 볼 수 있었다. 가령 올해 1분기에 대우조선 매출액이 13% 가량 늘었으나 영업손실이 줄기는커녕 120%나 증가했다는 사실을 들며 이런 기업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냐고 묻는 글들이 떠돌았다. 그 중에는 경영진의 무능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쓰인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단기 실적에 주목하는 글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산업과는 구별되는 조선업만의 특성에는 눈을 감았다. 철저히 재무제표의 숫자로만 판단하는 금융인의 입장에서 이 거대한 산업, 기업의 운명에 훈수를 두었다.
회계장부 속 검은 글자만 신성시하는 태도는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기업 회계장부에는 이윤을 남기는 과정에서 혹사당한 노동자의 사연이나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와 폐기물이 방출된 이야기 따위는 실리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모순과 재앙이 이 구조적 누락으로 거의 다 설명될 수 있을 지경이다.
한데 장부에서 생략되는 것이 이런 이야기들만은 아니다. 기업 재무제표에는 자본주의와 산업이 함께 하며 남긴 상처와 부작용뿐만 아니라 그 거창한 위업조차 누락돼 있다. 거기에는 한때 금융 투자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진수되던 거대한 배들의 이야기도 빠져 있다. 이런 배들은 비록 대기에 탄소를 뿜어내고 바다에 기름을 흘리기는 했을지언정 이른바 빅테크 기업들이 세상에 내놓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걸작이었다. 대우조선의 재무제표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표 바깥의 더 큰 진실에 무감각하다.
물론 가장 가관인 것은 현재 대우조선해양 최대 주주인 한국산업은행이다. 이름이 무려 '산업'은행이다. 또한 공공기관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관은 공공성을 추구하기는커녕 산업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산업은행은 어쩌다 떠맡게 된 대우조선을 현대 재벌에게 매각하는 데만 골몰했을 뿐(결국 실패했지만) 한국 조선산업과 그 역량을 살려 나가는 방향에서 이 기업을 운영하려고 고민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다. 말이 '산업'은행이지, 부도기업을 인수한 민간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금융의 시야에 갇혀 있을 따름이다.
어찌 일개 공공기관 탓이기만 할까. 몇 달 전까지 여당이었던 거대 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이번 파업이 다단계 하청, 저임금 구조 등의 오래 된 여러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이 당이 집권당이던 지난 5년 동안 정부-여당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어떠한 노력을 했었는가? 정부가 대우조선을 현대 재벌에게 떠넘기려다 실패했다는 것 말고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시민, 사회단체 회원들이 23일 오전 광화문역 인근에서 '희망버스' 출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날 교섭이 타결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예정대로 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연합뉴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산업'을 대변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정치권이 대우조선 문제 그리고 그 배경인 한국 조선업 전반의 모순을 해결하길 바란다면, 산업은행과는 역사와 구조, 성격이 전혀 다른 사회적 기구를 신설해야 한다.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 미-중 대립이 한꺼번에 덮치는 상황에서 국내 주요 산업을 살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산업은행 말고 이 기구가 대우조선 같은 기업의 공적 지분을 소유하면서, 기업이 철저히 산업 회생 논리에 따라 경영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정부, 재계, 노동자, 소비자/이용자, 지역사회 대표들이 이 기구에 참여해야 한다.
역사상 유사한 사례가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막 시작되려 하던 1970년대에 영국 노동당은 거대 자본이 국내 제조업에서 철수하려는 움직임에 맞서기 위해 국민기업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NEB)를 설립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국민기업위원회는 국내 주요 산업의 핵심 기업 지분을 소유하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 정책을 구사하는 기구이며, 정부, 재계, 노동계 대표들이 참여한다. 비록 국민기업위원회 제안 자체는 제대로 실현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이는 어쩌면 신자유주의 태동기보다 그 쇠퇴기인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한 대안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대안이 지지를 받고 실제 추진되려면, 반드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며 옹호하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주체가 있어야만, 한국판 국민기업위원회를 주창하더라도 설득력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실현되더라도 애초에 기대했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파업에 나선 조선업 하청 노동자들은 지금 분명 이런 주체다. 그들은 다단계 하청과 그로 인한 저임금, 불안정 고용, 산업 재해 위험에 시달리는 탓에 이런 문제의 해결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조선산업의 대안적 발전을 대변하는 입장에 선다. 그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다른 대기업 사업장의 통상적인 임금협상과 구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의 주장과 행동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계기로 이어지고 확대되려면, 하청 노동자들이 속한 노동조합, 즉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금속노조가 '산업'노동조합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산업노동조합이란 단순히 기존 기업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 형태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산업노동조합은 (기업이나 직종을 넘어) 산업의 시야에서 노동자의 공동 이익과 연대 의식, 대안을 만들어가는 조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산업'의 논리를 분명히 하고 이를 대변할만한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산업노동조합이다.
금속노조는 이미 작년에 기후 위기에 따른 산업 전환이 모든 노동자에게 정의로운 과정이 되도록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는 노사정 협상과 공동결정법 제정을 주창한 바 있다. 이는 우리 시대에 산업노동조합이 해야 할 임무를 뚜렷이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 시도였다. 그 임무란 '지구 생태계' 안에 자리한 '사회'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와 구별되고 대립, 충돌하기까지 하는)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제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투쟁이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에서 이런 각성과 노력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진지한 흐름으로도 나타나길 바래본다.
*이 글은 2022년 7월 26일자 프레시안에 기고된 글입니다.
정말 잔혹하고 몰지각한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한당들의 논평과는 달리, 이번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파업은 한국 사회에 참으로 소중한 각성의 기회를 열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음들을 던졌다.
정규직보다 훨씬 더 많은 하청 노동자의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산업이 과연 더 버틸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업의 토대인 숙련 노동자층이 해체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십 년 간 지속돼온 한국 조선업의 다단계 하청 구조를 끝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신자유주의의 한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우리가 반드시 대면하고 답해야 할 물음들이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이렇게도 재정리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산업'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산업'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자본주의' 아닌 '산업'의 논리는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놓여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 그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며 옹호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19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독(도크) 화물창 바닥에 스스로 용접한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본주의는 '산업'이 아니라 '금융'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와 '산업'을 굳이 떼어놓으려 하다니, 말이 안 된다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생각 속에서 둘은 하나로 겹쳐져 있다. 산업자본주의의 시작을 애써 '자본주의혁명'이라 부르는 학자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산업혁명'이라 한다. 이게 상식이다. '산업', 즉 근대 공업을 시작한 것이 자본주의이니 둘은 같은 사물이자 현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산업의 투자와 운영은 주로 자본가들의 몫이므로, 이 상식에 의문을 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산업'은 같지 않다. 분명히 서로 다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이윤 획득과 자본 축적이지 산업 발전과 유지가 아니다. 산업 투자와 운영은 이윤을 얻고 자본을 불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본가들은 이윤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더 많은 경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산업에 투자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산업에는 이런 자본가들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목표와는 다른 다양한 기능들이 있다. 모든 산업은 사회의 필요들을 충족하는 활동이다.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소득과 안정, 보람을 얻을 일자리를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사회가 지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봉사를 수행한다. 특히 현대의 산업은 생산과 서비스에 기계를 투입하여 이런 기능을 전에 없이 거대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이런 기능들 역시 자본가들의 지휘 아래 이뤄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자본가들은 오로지 이윤 획득과 자본 축적에 기여할 경우에 한해 이들 임무를 떠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이윤을 얻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이런 기능들 가운데 무엇이든 쉽게 내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윤 확보를 위해 이런 기능 가운데 상당 부분에 대해 '태업'을 벌이기까지 한다. 독점기업의 일방적인 가격 인상이나 대량 해고가 바로 그런 사보타주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본성은 산업보다는 금융 쪽에 더 가깝다. 돈을 불리는 것이 유일 절대 목표이며, 사회의 다른 모든 활동을 이 한 가지 목표에 복속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착시가 생긴다. 돈을 불리는 효과적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생산, 서비스와 새로운 기계를 결합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는 늘 산업혁명과 함께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산업의 영원한 수호자는 아니다. 아니, 재무제표에 적히는 화폐 수익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는 오히려 주저 없이 산업을 희생시킨다. 금융이 산업을 압도한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일 따름이다.
이번 파업 와중에도 우리는 이러한 시각을 대변하는 글들을 온라인에서 숱하게 볼 수 있었다. 가령 올해 1분기에 대우조선 매출액이 13% 가량 늘었으나 영업손실이 줄기는커녕 120%나 증가했다는 사실을 들며 이런 기업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냐고 묻는 글들이 떠돌았다. 그 중에는 경영진의 무능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쓰인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단기 실적에 주목하는 글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산업과는 구별되는 조선업만의 특성에는 눈을 감았다. 철저히 재무제표의 숫자로만 판단하는 금융인의 입장에서 이 거대한 산업, 기업의 운명에 훈수를 두었다.
회계장부 속 검은 글자만 신성시하는 태도는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기업 회계장부에는 이윤을 남기는 과정에서 혹사당한 노동자의 사연이나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와 폐기물이 방출된 이야기 따위는 실리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모순과 재앙이 이 구조적 누락으로 거의 다 설명될 수 있을 지경이다.
한데 장부에서 생략되는 것이 이런 이야기들만은 아니다. 기업 재무제표에는 자본주의와 산업이 함께 하며 남긴 상처와 부작용뿐만 아니라 그 거창한 위업조차 누락돼 있다. 거기에는 한때 금융 투자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진수되던 거대한 배들의 이야기도 빠져 있다. 이런 배들은 비록 대기에 탄소를 뿜어내고 바다에 기름을 흘리기는 했을지언정 이른바 빅테크 기업들이 세상에 내놓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걸작이었다. 대우조선의 재무제표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표 바깥의 더 큰 진실에 무감각하다.
물론 가장 가관인 것은 현재 대우조선해양 최대 주주인 한국산업은행이다. 이름이 무려 '산업'은행이다. 또한 공공기관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관은 공공성을 추구하기는커녕 산업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산업은행은 어쩌다 떠맡게 된 대우조선을 현대 재벌에게 매각하는 데만 골몰했을 뿐(결국 실패했지만) 한국 조선산업과 그 역량을 살려 나가는 방향에서 이 기업을 운영하려고 고민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다. 말이 '산업'은행이지, 부도기업을 인수한 민간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금융의 시야에 갇혀 있을 따름이다.
어찌 일개 공공기관 탓이기만 할까. 몇 달 전까지 여당이었던 거대 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이번 파업이 다단계 하청, 저임금 구조 등의 오래 된 여러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이 당이 집권당이던 지난 5년 동안 정부-여당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어떠한 노력을 했었는가? 정부가 대우조선을 현대 재벌에게 떠넘기려다 실패했다는 것 말고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시민, 사회단체 회원들이 23일 오전 광화문역 인근에서 '희망버스' 출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날 교섭이 타결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예정대로 희망버스 행사를 진행했다. ⓒ연합뉴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산업'을 대변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정치권이 대우조선 문제 그리고 그 배경인 한국 조선업 전반의 모순을 해결하길 바란다면, 산업은행과는 역사와 구조, 성격이 전혀 다른 사회적 기구를 신설해야 한다.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 미-중 대립이 한꺼번에 덮치는 상황에서 국내 주요 산업을 살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산업은행 말고 이 기구가 대우조선 같은 기업의 공적 지분을 소유하면서, 기업이 철저히 산업 회생 논리에 따라 경영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정부, 재계, 노동자, 소비자/이용자, 지역사회 대표들이 이 기구에 참여해야 한다.
역사상 유사한 사례가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막 시작되려 하던 1970년대에 영국 노동당은 거대 자본이 국내 제조업에서 철수하려는 움직임에 맞서기 위해 국민기업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NEB)를 설립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국민기업위원회는 국내 주요 산업의 핵심 기업 지분을 소유하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 정책을 구사하는 기구이며, 정부, 재계, 노동계 대표들이 참여한다. 비록 국민기업위원회 제안 자체는 제대로 실현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이는 어쩌면 신자유주의 태동기보다 그 쇠퇴기인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한 대안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대안이 지지를 받고 실제 추진되려면, 반드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며 옹호하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주체가 있어야만, 한국판 국민기업위원회를 주창하더라도 설득력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실현되더라도 애초에 기대했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파업에 나선 조선업 하청 노동자들은 지금 분명 이런 주체다. 그들은 다단계 하청과 그로 인한 저임금, 불안정 고용, 산업 재해 위험에 시달리는 탓에 이런 문제의 해결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조선산업의 대안적 발전을 대변하는 입장에 선다. 그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다른 대기업 사업장의 통상적인 임금협상과 구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의 주장과 행동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계기로 이어지고 확대되려면, 하청 노동자들이 속한 노동조합, 즉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금속노조가 '산업'노동조합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산업노동조합이란 단순히 기존 기업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 형태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산업노동조합은 (기업이나 직종을 넘어) 산업의 시야에서 노동자의 공동 이익과 연대 의식, 대안을 만들어가는 조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산업'의 논리를 분명히 하고 이를 대변할만한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산업노동조합이다.
금속노조는 이미 작년에 기후 위기에 따른 산업 전환이 모든 노동자에게 정의로운 과정이 되도록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는 노사정 협상과 공동결정법 제정을 주창한 바 있다. 이는 우리 시대에 산업노동조합이 해야 할 임무를 뚜렷이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 시도였다. 그 임무란 '지구 생태계' 안에 자리한 '사회'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와 구별되고 대립, 충돌하기까지 하는) '산업'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제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투쟁이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에서 이런 각성과 노력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진지한 흐름으로도 나타나길 바래본다.
*이 글은 2022년 7월 26일자 프레시안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