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
[이슈와 서평5] MZ세대 스타일의 사회주의 본능은 어떻게 생겨날까?
'사회주의'.
많은 기성세대들에게 이 용어는 온갖 복잡 다기한 이미지와 마타도어와 참혹한 장면들이 뒤범벅으로 연상되는 '기피'용어다. 어쩌면 박물관에 영원히 잠자야 할 지난세기의 잘못된 유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사회주의라는 용어만 그렇게 박제화시켜야만 하는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저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참여사회주의를 자신의 대안사회로 아무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있는 사례를 봐도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특별히 기피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피케티도 자신도 소련 붕괴이후 성인이 되었기에 스스로 과거 특정 유형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공언했지만, 아예 냉전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21세기에 성인이 된 밀레니얼 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사회주의라는 '위험 천만한 단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랑이나 민주주의에 분명한 정의를 요구할 수 없듯이, 사회주의도 완벽한 정의를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이나 민주주의처럼 사회주의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우리를 이끄는 중요한 원칙이다."
이것이 미국의 1988년생 민주사회주의자이자 온라인 잡지 <커런트 에페어즈>의 창간자 네이선 로빈슨(Nathan Robinson)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다. 그에게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민주주의나 사랑만큼이나 추상적이면서도 또 다양한 내용을 담을 있으며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 용어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가 2019년에 쓴 책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Why You Should Be a Society)>이 번역되었다.
저자가 사회주의를 호출하는 방식은 기존의 역사적 경험이나 이론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로부터 자연스럽게 일종의 '사회주의적 본능'을 끄집어낸다. 그는 이렇게 현실을 진단한다.
"'지금이 가장 살기 좋은 때'라는 주장은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틀린말이 아니었다.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더 건강하고 잘 살았으며, 피로 얼룩진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 20세기에 비해 21세기는 너무나 멋진 시대다. 그러나 평균적 참이 반드시 모두에게 참은 아니다. 낙관적 메시지에 공감한 사람은 잘사는 이들뿐이었다. 빚과 나쁜 건강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실직자에게 낙관적 메시지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어찌보면 평이한 진단이다. 그런데 저자는 명백하게 부조리한 이같은 현실을 그저 폼나게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부조리한 것이 명백하다면 그냥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 그대로 수용하거나 수긍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성공할 가능성과 상관없이 참고 견딜 수 없는 조건에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어쩌면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의 출발점은 여기가 아닐까? 해방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사회운동도 바로 이런식으로 '대안이 있든말든 부조리한 현실을 눈감을 수 없다'는 강한 본능으로 시작했던 것 아닐까? 수많은 자칭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가들의 시작점도 여기가 아닐까?
/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세대에는 현 상태를 변명하는 주장에 만족하지 않고, 예리한 도덕적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노예폐지론자든, 여성참정권론자든, 시민권 운동가든 후대의 시각은 호의적이었다.
노예제, 아동노동, 위험한 현장 등에 반대해 투쟁을 벌인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더 안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장벽과 마주쳤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자신이 말하는 민주사회주의를 스스로 정의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세상이 더 좋아져야 하고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며,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불의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지구의 번영을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
너무 초보적이고 낭만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30대 중반의 나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한 독서를 섭렵하고 있음을 금방 알게 되고, 사회주의 서적 몇권 읽고 심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적역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장밋빛 견해는 순진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순진한 것으로 치면 인류가 원래 게으르고 이기적이라는 가정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요점은 그나 어설픈 사회주의자들의 개념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바꿔야 할 현실로부터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이나 의지를 자연스럽게 유도해낸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미국의 30대 사회주의운동가로부터 사회주의가 가슴뛰는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용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
* 청년들을 두고 어설픈 딱지붙이기 놀이가 싫증났는지, 기성세대는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구축에 이용하는 차원까지 나가버렸다. 이제는 우리사회에서도 기성세대가 만든 지독히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사회적 유산에 맞서 밀레니얼세대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된 사회주의적 비전과 의지가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에도 지금 우리사회는 '사회주의'정도 수준의 위험스럽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아니면 어떻게 바꾸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하긴 1세기만에 가장 최악의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 1세기 동안 가장 뽀죡했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많은 기성세대들에게 이 용어는 온갖 복잡 다기한 이미지와 마타도어와 참혹한 장면들이 뒤범벅으로 연상되는 '기피'용어다. 어쩌면 박물관에 영원히 잠자야 할 지난세기의 잘못된 유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사회주의라는 용어만 그렇게 박제화시켜야만 하는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저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참여사회주의를 자신의 대안사회로 아무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있는 사례를 봐도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특별히 기피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피케티도 자신도 소련 붕괴이후 성인이 되었기에 스스로 과거 특정 유형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공언했지만, 아예 냉전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21세기에 성인이 된 밀레니얼 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사회주의라는 '위험 천만한 단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랑이나 민주주의에 분명한 정의를 요구할 수 없듯이, 사회주의도 완벽한 정의를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이나 민주주의처럼 사회주의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우리를 이끄는 중요한 원칙이다."
이것이 미국의 1988년생 민주사회주의자이자 온라인 잡지 <커런트 에페어즈>의 창간자 네이선 로빈슨(Nathan Robinson)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다. 그에게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민주주의나 사랑만큼이나 추상적이면서도 또 다양한 내용을 담을 있으며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 용어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가 2019년에 쓴 책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Why You Should Be a Society)>이 번역되었다.
저자가 사회주의를 호출하는 방식은 기존의 역사적 경험이나 이론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로부터 자연스럽게 일종의 '사회주의적 본능'을 끄집어낸다. 그는 이렇게 현실을 진단한다.
"'지금이 가장 살기 좋은 때'라는 주장은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틀린말이 아니었다.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더 건강하고 잘 살았으며, 피로 얼룩진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 20세기에 비해 21세기는 너무나 멋진 시대다. 그러나 평균적 참이 반드시 모두에게 참은 아니다. 낙관적 메시지에 공감한 사람은 잘사는 이들뿐이었다. 빚과 나쁜 건강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실직자에게 낙관적 메시지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어찌보면 평이한 진단이다. 그런데 저자는 명백하게 부조리한 이같은 현실을 그저 폼나게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부조리한 것이 명백하다면 그냥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 그대로 수용하거나 수긍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성공할 가능성과 상관없이 참고 견딜 수 없는 조건에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어쩌면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의 출발점은 여기가 아닐까? 해방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사회운동도 바로 이런식으로 '대안이 있든말든 부조리한 현실을 눈감을 수 없다'는 강한 본능으로 시작했던 것 아닐까? 수많은 자칭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가들의 시작점도 여기가 아닐까?
/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세대에는 현 상태를 변명하는 주장에 만족하지 않고, 예리한 도덕적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노예폐지론자든, 여성참정권론자든, 시민권 운동가든 후대의 시각은 호의적이었다.
노예제, 아동노동, 위험한 현장 등에 반대해 투쟁을 벌인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더 안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장벽과 마주쳤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자신이 말하는 민주사회주의를 스스로 정의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세상이 더 좋아져야 하고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며,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불의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지구의 번영을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
너무 초보적이고 낭만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30대 중반의 나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한 독서를 섭렵하고 있음을 금방 알게 되고, 사회주의 서적 몇권 읽고 심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적역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장밋빛 견해는 순진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순진한 것으로 치면 인류가 원래 게으르고 이기적이라는 가정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요점은 그나 어설픈 사회주의자들의 개념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바꿔야 할 현실로부터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이나 의지를 자연스럽게 유도해낸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미국의 30대 사회주의운동가로부터 사회주의가 가슴뛰는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용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
* 청년들을 두고 어설픈 딱지붙이기 놀이가 싫증났는지, 기성세대는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구축에 이용하는 차원까지 나가버렸다. 이제는 우리사회에서도 기성세대가 만든 지독히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사회적 유산에 맞서 밀레니얼세대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된 사회주의적 비전과 의지가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에도 지금 우리사회는 '사회주의'정도 수준의 위험스럽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아니면 어떻게 바꾸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하긴 1세기만에 가장 최악의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 1세기 동안 가장 뽀죡했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