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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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반대의 정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자
'이재명·윤석열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느 시대나 공론장을 주도하는 그 시대만의 전형적 지식인이 있다. 내가 어렸을 적인 1980년대만 해도 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논설을 쓰는 이들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TV 심야토론에 자주 나오는 논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까지도 계속됐는데,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다시 시대가 크게 한 번 바뀐 느낌이다. 공중파 TV에도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종합편성 채널과 라디오, 여러 온라인 플랫폼을 넘나들며 더욱 이름을 알리는 정치평론가 내지는 칼럼니스트들이 공론장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A.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에 가장 가까운 실천을 하는 것은 여의도 정객이나 정당 관료가 아니라 이들 정치평론가일 것이다.
그만큼 제도정치 공간과 대중을 잇는 데 정치평론가들의 역할이 크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정치평론가 세계에서도 압도적 다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양대 진영의 유기적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양당 독점 정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이니 그 세력 관계가 냉정히 반영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양대 진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현재 한국 정치의 근시안적 지평 너머로 이끌려 하는 정치평론가들이 있다. 대체로 진보정당 활동 경험이 있는 젊은 칼럼니스트들인데,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라는 다소 긴 제목을 단 신간(이데아, 2022)의 저자 김민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출처:이데아)
이번 대선을 넘어 오늘날의 민주주의 자체를 진단하는 책
출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대선 일정에 맞춰 낸 책이겠거니 짐작했다. 대선 투표일을 불과 한 달 반 정도 앞두고 있고, '투표'라는 말이 들어간 책 제목 역시 이런 연상을 하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다. 저자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을 보면, 원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시점은 작년 중반쯤이다. 대선 시기에 책을 내는 게 이롭겠다는 출판사의 전략이 반영됐을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대선에 직접 개입하거나 반짝 흥행을 하려고 쓰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책을 펼쳐 목차를 훑는 순간, 더욱 확실해졌다. 첫 장의 제목은 '진보 또는 보수'이고 부제가 ''백서' vs '흑서''이니, 지금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를 내세우며 맞붙는 양대 진영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한다. 이 장을 비롯한 앞부분 네 장이 계속 이 양대 진영의 행태와 내면을 분석한다. 여기에서 곧바로 대선 이야기로 넘어간다면, 평소에도 양당 독점 정치를 비판해온 저자가 대선에 맞춰 양대 진영 '모두 까기'를 단행본으로까지 냈구나 하며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제5장부터 이 책의 논의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확장된다. '진보와 퇴행의 변주'라는 제목을 단 제5장은 미국 정치를 다루며, '한쪽으로 쏠리는 진자운동'이라는 표제의 제6장 주제는 일본 정치다. 실제 읽어보니 무려 독립혁명 무렵부터의 미국 정치를 분석하고, 1990년대에 버블 붕괴와 더불어 전개된 정치 '개혁' 국면 이후의 일본 정치를 상세히 짚는다. 이 두 장을 거친 뒤에 저자는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이라는 요즘 전 세계 정치의 뜨거운 쟁점을 향해 내닫는다.
여기까지 읽고야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실은 책 내용을 정직하게 잘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단지 영화 <아수라> 속 '안남시장'을 연상시키는 분이 싫어 국민의힘 후보를 찍겠다거나 제2의 '최순실'들의 조종을 받는 것 같은 분은 절대 당선되면 안 되니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찍겠다는 2022년 벽두 대한민국 상황을 풍자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상황을 낳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자체,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구 위 모든 나라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민주주의를 심층 분석한다.
저자 김민하는 책의 앞부분에서 조국 '백서' 진영과 조국 '흑서' 진영으로 나뉘어 벌인 싸움, '반일'과 '반공'이라는 낡은 과거를 되살려 반복되는 그 싸움 그리고 이런 출구 없는 다툼 속에서 나타나는 팬덤정치나 '공정' 논란 같은 병적 징후를 하나하나 짚는다. 서로 물고 뜯는 양쪽이 얼마나 자기 논리조차 배반하며 어이없는 싸움을 이어가는지 냉철히 따지기에, 아직도 어느 한 편에 동질감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분명 핏발을 세울 테고, 둘 모두에 거리를 두는 나 같은 이가 보기에도 한국 사회가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대개 한국 사회의 낙후성이나 경로 이탈을 질책한 뒤에 '정상'적 민주주의의 사례나 전형을 제시하고 마치 제2의 문명개화 같은 각성과 전환을 촉구하며 끝맺게 마련이다. 그러나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는 정확히 이런 접근법에 도전하는, 이와는 대립되기까지 하는 쪽으로 독자의 눈길을 이끈다.
지금 한국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 '반대의 정치'의 세계 안에 갇혀 있다! 미국도, 일본도, 심지어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밀랍인형 전시장처럼 오해 받는 유럽조차 그러하다. 모든 나라의 대다수 대중이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민주주의로 여기며, 간판은 각각 '보수'와 '진보'이되 실은 지구자본주의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다를 것도 없는 두 세력의 한 쪽에 서서 '반대의 정치'에 생을 허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쇠퇴 이후에도 세상에 구원은커녕 탈출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민하의 책은 이렇게 사태의 핵심을 향해 직진한다. 헬조선은 헬지구의 일부일 뿐이며, 우리에게는 서방정토도, 도망갈 '소도(蘇塗)'도 없다. 민주주의가 오직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인 세상에서 지옥의 바깥은 없다.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반대의 정치
현실의 민주주의가 허울만 민주주의일 뿐이라는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한다지만 실제로는 자본을 소유한 계급과 나머지 대중의 권한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게 이러한 비판의 대표적인 논리였다. 이런 시각에서 현실에 도전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이들이 현존 민주주의에 붙인 이름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오늘날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두 세력이 독점하는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그 중에서도 이념 스펙트럼상 왼쪽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재벌 이재용과 청와대, 재벌 정용진과 여의도 정치가 장단을 맞추는 꼴을 보노라면, 이 말이 21세기 한국에도 딱 맞는 규정이겠다 싶다. 그러나 너무나 명백한 외관 탓에 그 복잡한 작동 메커니즘을 무지의 베일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되고 있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말로 현실을 비판한 가장 저명한 이론가들이 남긴 분석은 대개 의회 기구의 한계, 관료 기구의 가공할 위험성 등등을 맴돈다. 지금까지 빛을 발하는 통찰이며, 하나도 버릴 것은 없다. 그러나 부족하다. 대의제가 문제이고 비선출직 관료 권력의 위험이 명백하다면, 이런 문제를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벌써 몇 번은 혁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몇 세대에 걸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미국이나 서유럽에서는 정치가 오히려 더 퇴보한다는 소식은 있어도 혁명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목격담은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론에 구멍이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의회가 무력하고 관료 권력이 비민주적이라 해봐야 그것은 대중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의 나열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진실을 다 알아챈 대중의 대체적인 반응조차 기존 질서의 유지에 이롭게 조율하고 고착시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는 자신을 넘어서려는 대중의 열망 그리고 그 좌절에 뒤따르는 실망과 냉소까지 허울뿐인 '보수 대 진보',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의 진자운동 안에 가둬둘 줄 안다.
고전 이론가들에게는 이런 분석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은 대체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통선거제도라는 그 최소한의 전제를 도입하기 훨씬 전이나 아니면 이제 막 도입하던 때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여명 혹은 유년기만을 봤을 뿐이다. 그 완성형 혹은 노숙해진 형태는 눈치도 못 챘다. 그런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마주하는 운명은 그들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의 몫으로 떨어졌다.
김민하의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 '노숙해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빈 부분을 메꾼다. 저자가 채워 넣은 중요한 조각은 '반대의 정치'라는 닫힌 세계이자 그런 세계를 유지하는 저마다의 장치들, 기예들이다. 한국의 양당 독점 정치도, 일본의 자민당 독점 정치도,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요즘 미국-유럽 정치도 이 '반대의 정치'가 각각의 국민적 지형 안에서 전개되는 양태들이다. 이를 직시하지 않고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바깥을 내다보고 이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다.
"'반대의 정치'는 일상을 지배한다. 진보에 대한 반대로서 보수를 자칭한 정권이 실패하면 진보로 진자가 쏠리고, 보수에 대한 반대를 내세우며 진보를 자칭한 정권이 실패하면 진자는 다시 반대 방향, 즉 보수로 되돌아온다. 진자 운동은 거듭되지만 축이 움직이는 방향은 그대로다.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 진보'의 반대로서 '진짜 진보', '현재 보수'의 반대로서 '진짜 보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함께 커진다. 그래서 이른바 '대깨문'과 '태극기 부대'가 한쪽 극단을 차지한 채로 중도와 합리를 지향하는 정치와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이 '반대의 정치'라는 하나의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247쪽)
말하자면 광화문 태극기부대와 서초동 촛불이 반분하는 세상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만의 특이한 '민속적' 풍경이 결코 아니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온 세상이 마침내 도달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장면이다. 또한 이재명이 대통령인 미래에서든, 윤석열이 대통령인 미래에서든 우리가 반드시 다시 마주할 장면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혁명이란,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
그럼 대안은? 저자가 마지막 장 '체제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에서 제시하는 방향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이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실망을 반복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중이 무대에 난입하는 민주주의이며, 몇 년마다 열리는 투표소에 갇힌 민주주의가 아니라 고공작업이 벌어지고 고압전류가 흐르며 고속차량이 지나가는 모든 작업장에서 작동할 줄 아는 민주주의다.
그런 민주주의가 가능하냐고? 그런 게 과연 있을 수 있냐고? 누구든 이렇게 반문할 정도이니, 어느 누구든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한다면 그게 얼마나 커다란 변화이겠는가? 그러는 바로 그 순간이 멀지 않은 미래의 어떤 혁명의 첫 번째 발화점일 것이다. 김민하는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듯 책의 마지막에서 이 전망을 주저 없이 꺼내든다.
될수록 많은 이들이 너무 거창한 듯 하지만 실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이 전망과 마주하게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정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몇몇 헌법 문구 변경 정도로 하찮은 대접을 받지 않으려면, 이재명이든 윤석열이든 누군가를 몰아내기 위한, 단지 그것만을 위한 촛불시위라는 소극에 동원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이 겨울의 칼바람 속에서 김혜경 씨나 김건희 씨의 속보를 확인하느라 휴대전화에 눈길이 붙잡혀 있다가도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싶은 모든 이들에게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와의 만남을 적극 추천하는 이유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