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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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지금 필요한 정치는 메르켈식 정치가 아니다
떠나는 메르켈을 향해 박수칠 수 없다
지난 26일, 독일에서는 연방의회 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가 복잡하게 나와 차기 정부 윤곽은 몇 주, 아니 몇 달 뒤에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2005년부터 총리 자리를 지켜온 앙겔라 메르켈은 물러난다는 것이다. 내각책임제 치고는 역대 총리의 재임기가 긴 편인 독일에서도 메르켈의 집권 기간은 특히 길었다. 같은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인 헬무트 콜처럼, 무려 16년이다.
이 정도 권좌에 있었으면 지겨워서라도 쓴 소리가 나올 법한데, 언론 지면은 퇴임을 앞둔 총리를 향해 찬사와 덕담 일색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진보정당에 속한 정치인들조차 찬양 대열에 기꺼이 합류한다. 메르켈에 비유되거나 비교 대상이 되기라도 하면, 마치 대단한 영광인 양 여긴다. 메르켈이 보수정당 소속임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런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 동안, 전 세계 주요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 버티고 선 메르켈의 모습은 세상이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 아베 신조,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자들이 늘어선 무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대국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범죄영화에서나 볼 법한 얼굴들 사이에서 그나마 인류의 체면을 세워준 이는 촐싹대는 에마뉘엘 마크롱이나 쥐스탱 트뤼도가 아니라 늙은 남자들 몇 명쯤 너끈히 상대할 것 같은 '슈바벤 아줌마'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 평가다.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정치인의 질이 너무도 떨어졌기에 메르켈이 부각되는 것일 뿐, 메르켈이 보여준 지도력 역시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아니, 메르켈식 정치가 시대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 정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극우파 바람을 키운 것은 메르켈
흔히 메르켈의 치적으로 언급되는 것 가운데에 난민 포용 정책이 있다. 목숨 걸고 지중해를 건너오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이주민들을 향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던 2010년대 중반에 독일 총리 메르켈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내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민을 대폭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독일에는 이주민 2세 어린이들 중에 유독 '앙겔라'라는 이름이 많다고 한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색깔을 띤 반대쪽 면도 있다. 바로 그 무렵부터 독일에서는 '이주민 반대', '무슬림 반대'를 전면에 내건 극우 대중운동이 세를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급기야 '독일을 위한 대안'(이하 '독일대안당')이라는 극우정당의 결성과 예기치 않은 돌풍으로 이어졌다. 나치의 나라라는 업보 탓에 오랫동안 적어도 제도정치에서는 '극우파 청정 지대'임을 자랑해온 나라가 이제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를 바 없이 극우정당의 도전에 흔들리는 처지가 됐다.
이러한 극우파의 부상과 메르켈의 난민 정책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연관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메르켈이 자당 내 극우파가 주장한 대로 처음부터 국경을 폐쇄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메르켈은 이주민들을 포용하면서도 극우 포퓰리즘의 반격을 차단 내지는 최소화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독일 경제를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노력을 병행했더라면, 결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다. 즉, 문제는 난민 정책이 아니라 메르켈의 경제사회정책 기조에 있었다.
얼핏 보면, 메르켈 시대 16년의 경제 성적은 문젯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보기 드문 위업인 것 같다. 2008년 이후 유럽 경제가 계속 침체라는데, 독일만은 무역수지가 엄청난 흑자다. 무역수지만이 아니다. 연방정부 재정수지도 흑자다. 유럽의 돈이란 돈은 모두 프랑크푸르트의 은행들로 흘러들고, 그럴수록 '만국의 위에 선 독일'이라는 이제는 부르지 않는 독일 국가 1절이 나머지 유럽인들에게 무거운 현실로 다가온다.
이게 다 독일인의 근면성 덕분인가? 아니면 전설적인 제조업 역량 덕분? 이런 신화들에도 얼마간 진실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유로화를 빨아들이는 독일 경제의 흑자 기조는 실은 '지대 수익'이다. 어디에서 나오는 지대인가? 바로 인류사에 처음 등장한 유로존이라는 통화동맹의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지대다. 지금 독일은, 마치 한 국가인 것처럼 통화는 통합되어 있으나 여전히 회원국마다 재정은 분리된 유로존의 현실에서 지대 수익을 착복하고 있다.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이 만약 하나의 국민국가라면, 비록 돈이 프랑크푸르트로 몰리더라도 베를린은 이를 유럽 곳곳으로 환류시킬 것이다. 연방에 속한 각 주에 하듯이 그리스에, 포르투갈에, 스페인에 투자해 유로존 전체의 경기를 떠받칠 것이다. 그러나 통화 통합으로 돈은 독일로 몰리지만, 재정은 통합되지 않았기에 이런 환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독일에 쌓일 뿐이다. 이것이 2010년대 독일 경제 신화의 간단한 진실이다.
그렇다고 독일에 모이는 돈이 독일 국민들에게 고루 퍼져 국경 안에서라도 잔치판이 벌어지냐면, 그것도 아니다. 전임 슈뢰더 정부(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가 열어놓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복지 축소 탓에 독일 자본이 거두는 막대한 이윤이 임금 상승을 통해 분배될 통로가 막혀 버렸다. 더구나 독일 정부와 자본은 국경 바깥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흑자 규모에 걸맞는 투자를 회피하고 있다. 신규 주택 건설에 돈을 쓰기보다는 기존 주택을 사들이는 식이다. 역으로 이러한 노골적 긴축 기조 덕택에 전례 없는 '쌍둥이 흑자'가 더욱 강화된다.
말하자면 독일 경제가 잘 나가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만큼 구조적 희생을 감수하는 덕분이며, 독일 경제가 잘 나간다고 하여 독일 국민들까지 잘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메르켈 정부가 자랑하는 경제 수치와 서민의 살림살이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거의 없다. 독일 국민 가운데에서도 불안정 노동시장에 내몰린 이들일수록 이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이들은 주로 구 동독 지역에 몰려 있다. 독일대안당은 바로 이런 지역적-계층적 기반을 딛고 급성장했다.
세상의 방향을 바꿀 정치적 기회들을 무산시키다
이런 독일 경제의 진로가 결정된 첫 번째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였다. 이때 독일 은행들 역시 부도 위기에 몰렸다. 집권한 지 2년밖에 안 됐던 메르켈 총리에게는 뜻밖의 엄청난 시련이었다. 거대 은행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4060억 유로(약 557조 원)의 공적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고, 은행을 살리는 대신 독일 정부는 긴축 재정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이 시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내 독일의 운명은 사뭇 다름이 확인되었다. 독일 정부에 청구서를 내민 것은 독일 은행만이 아니었다. 다른 유로존 회원국 정부들도 달려왔다. 하지만 결국 돈을 쏟아 부어야 할 대상은 역시 독일 은행들이었다. 주로 독일과 프랑스 은행에 빚을 진,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이 구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메르켈 정부는 남유럽 국가들을 구해준다고 생색을 내며 다시 수백조 원을 독일 은행들에 퍼부었다. 그 대가로 독일 정부는 자기네가 대주주인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 이 세 기구를 통해 남유럽 국가들에게 가혹한 긴축 정책을 강요했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지금 독일 경제를 떠받치는 유로존 내 구조가 완성되어갔다. 일단 유로화가 독일 안으로 들어오면, 이는 좀처럼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독일 안의 금융 과두 세력의 호주머니에 쌓이고 또 쌓인다. 프랑크푸르트의 은행들은 금융위기에서 기사회생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대하게 자본을 축적했고, 이는 독일 경제의 성과로 홍보됐다. 메르켈은 집권 기간 내내 독일-유럽의 금융 과두 세력에게 권력을 몰아주었다.
이것 말고 다른 길은 없었던가? 아니다. 몇 차례 방향을 전환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매번 이런 기회를 무산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대표적 희생양이었던 그리스의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칼럼 “앙겔라 메르켈은 유럽과 세계에 해악을 끼쳤다”(<Jacobin> 2021. 9. 26)를 통해 국제적인 메르켈 칭찬 열풍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글에서 바루파키스는 최소한 두 차례 이상 전환의 기회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가령 2015년 그리스 외채 협상이 그런 계기였다. 이때 독일 정부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소속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에게 긴축 정책 지속 없이 구제 금융 연장은 없다고 협박했다. 그리스 정부는 국민투표까지 실시하며 버텼지만, 결국은 독일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전 세계 주류 언론은 이 광경에서 그리스 정부의 비참하고 비굴한 모습만 부각시켰지만, 더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할 쪽은 독일 정부다. 메르켈이 이끄는 대연정(사회민주당이 참여한)은 그리스와의 재협상을 오히려 지대 수익에 따른 경제 패권을 청산할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긴축 정책 강요를 중단하고 정반대로 유로존 경제를 살릴 대규모 투자 계획(그린 뉴딜의 선구적 사례가 됐을)에 착수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유로존은 재정 통합을 향해 성큼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메르켈은 현상 유지를 택했다.
장기 집권의 끝자락에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중대한 기회였다. 2020년 7월 유럽연합이 팬데믹에 맞서 경제를 살린다며 1천조 원이 넘는 '회복기금'에 합의하자 언론은 곧바로 메르켈 지도력의 승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메르켈이 남유럽 채무국과 협상하며 보인 강경한 태도에서 벗어나 확장 재정 기조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열띤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박수만 칠 일은 아니다. 본래 유럽연합 13개 회원국 정상은 팬데믹이 시작되자 유로채권 발행을 제안했었다. 취약한 국가들의 코로나19 대응과 경제 회생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채무국 외채를 탕감하자는 취지였다. 어쩌면 팬데믹을 계기로 유럽연합 차원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종식하자는 제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르켈의 마지막 치적이라는 회복기금은 실은 이 원래 제안에서 핵심 내용이 다 빠진 피상적이고 기만적인 대책일 뿐이다. 총액이 1천조 원이 넘어 대단해보일지 모르지만, 절반에 가까운 약 500조 원은 나중에 상환해야 하는 새로운 대출이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독일 은행들에 진 빚만 더 늘어난 셈이다.
한편 나머지 절반은 상환 의무가 없는 보조금이지만, 대개 남유럽 기업들에 직접 지원될 예정이다. 그러면 남유럽 국가들의 대중이 아니라 자산 소유 계급만 이득을 보게 될 것이며, 이들을 통해 수익을 거둬들이는 독일 금융 세력 역시 손쉽게 승자의 지위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회복기금은 정치 무대를 떠나는 메르켈이 유럽에 안겨준 정말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유럽의 대중이 아니라 그 과두 지배자들에게 말이다.
지금 필요한 정치는 메르켈식 정치가 아니다
메르켈 집권 16년을 돌아보다 보면, 자꾸 조선의 정조가 떠오른다. 정조는 분명 대(大)정치가였다. 당대의 윤리 규범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려 애썼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꼼꼼히 정무를 챙겼고, 감동적인 일화도 많이 남겼다. 당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범접하기 힘든 모범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정조의 정치는 실패한 정치였다. 시간 낭비였다. 그 시대에 반드시 필요했던 결정들을 하나도 감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이 산업혁명에 돌입해 문명의 대전환이 막 시작되려는 즈음인데 문호를 개방하지도 않았고, 바로 다음 임금부터 조선을 나락에 빠뜨릴 조세 체계의 개혁도 시도하지 않았다. 조선은 훌륭한 임금 정조의 모범적인 정치 아래에서 이미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상태였다.
메르켈식 정치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딱 이러하지 않을까. 메르켈은 좋은 정치가였지만, 메르켈의 정치는 실패한 정치였다. 위급한 전환기에 필요한 전환의 결단은 하나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르켈 집권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이런 지도력으로는 인류의 생존조차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지도력, 전혀 다른 정치가 필요하다. 떠나는 메르켈에게 박수를 칠 수 없는 이유로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